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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징용희생자 해방72년만에 고국의 품에서 고이잠들다
8월 16일 서울시립승화원 추모원에 안치,장차 DMZ통일동산에 100만유해안치추진
등록일: 2017-08-16 , 작성자: 광진의소리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 33위가 해방72년만에 환국하여 그리운 고국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소재 서울시립승화원추모원에서 고이 잠들다.조명균 통일부장관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조화와 조기가 함께 님들의 영면을 기원하고 있다.유해안치 승화원모습/광진의소리
<광진의소리 ‘72광복절민족공동행사 기획특집(2) =유윤석 기자>
이번 72주년 8.15광복절민족공동행사는 한반도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전국에 걸쳐 밤새 폭우에 이어 이른 아침에도 거친 비바람이 미친 듯이 들이쳐 제2의 한반도전쟁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하늘이 분노로 엄중 경고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행사 오전 11시임에도 불구하고 광화문광장 행사장은 나라를 걱정하는 수많은 애국시민과 청년학생 자원봉사자들로 넘쳤다.
이번 8*15광복절민족공동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물밑합의과정을 통해 남과 북의 최고 당국자간의 양해하(유해보관측인 일본 국평사 윤벽암 스님은 조총련계로 북측의 동의하에 움직이는 바,
이번 한국방문자체가 처음인데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의 역사적 의미를 신중하게 평가한후 한국방문을 허가했다)에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33인을 해방72년만에 직접고국땅에 모셔와 국민추모제’를 거행하는 사실상 ‘남북공동행사’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오늘 행사는 일제강제희생자유해봉한국민추모제를 1부행사로 하고, 2부행사에서 본행사인 제72주년 광복절민족공동행사로 진행했다.
또한 이번 행사는 장차 통일조국을 지향하는 본 위원회의 취지에 따라 특별히 ‘통일농사단 발대식’으로 이어졌다.
예년의 다양한 문화예술공연이 대폭 축소되었다.
제1부행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7대종교(기독교 불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유교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각 종교의식에 따라 공동으로 집례했다.
대회장은 김영주 목사(KCRP 대표회장)가 맡았고,유해봉환위원장 무원스님이 유해봉환선언문을 낭독하였고,이범창 천도교 종무원장,김재완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상임부회장,윤벽암 일본 동경 국평사 주지스님등이 축사를 했다.
한편 본행사인 2부행사는 전 광복군동지회 김우전 회장을 대회장으로 하고, 김영두 대종교 종무원장,삼학법보사 주지 신광스님,유윤석 한민족운동단체연합 공동대표 등 9명이 공동대회장으로 하여 축사가 진행되었다.
이날 세찬 비바람속에서도 오전 10시(식전행사)부터 시작한 행사는 오후 2시 무렵 종료하고 33인의 유해봉환단은 차량으로 DMZ순례길에 올랐다. 장차 DMZ통일동산에 안치하기 위한 절차로 분단조국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한 의식행사다.
DMZ순례를 마친 유해는 8월 16일 오전 서울시립승화원에 최종 안치되었다.
편안한 고국의 품에서 고이 잠들게 되어 온 국민,온 겨례와 함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 용산역에서 노제시작~남산~탑골공원~광화문광장 위패차량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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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투하한날 8월 6일 강제징용희생자유해 환국
■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투하한날 8월 6일 강제징용희생자유해 환국
8월 6일은 일본항복의 결정탄이 된 일본히로시마 원폭투하의 날이다.
72년전 1945년 8월 6일,일본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첫 투하된 날이다.
이를 상징하는 날,우리 일제강제징용희생자들의 환국이 이뤄졌다. 일본국 패망의 전초전을 기념하는 의미다.
이번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는 8월 6일 인천공항에 밤 10시경 들어온후,
옛 서대문 형무소자리에 있는 순군선열추모관에 임시 안치한후 유해봉환단은 위패를 모시고
8월 14일 일제치하 전국에서 끌려온 강제징용자들의 집결지인 용산역에서 노제를 지낸후
차량행렬로 이태원 등을 거쳐 남산노제를 지냈다.
이어 차량봉환행렬단은 일제치하 3.1기미독립운동의 발발지인 종로 탑골공원노제를 거쳐 광화문거리를 도보로 행진한후 광화문광장에서 추모제 전야제를 거행했다. 이후 다음날 역사적인 8.15광복절민족공동행사 72주년을 맞아 ‘일제강제징용희생자 국민추모제’를 거행한후,
장차 통일의 의지를 구현하기위해 오후 2시 DMZ순례를 한후 다시 서대문 독립문 추모관으로 돌아와 일박후 다음날 16일 드디어 서울시립승화원에 영면을 위한 안치가 진행되었다.
■일본 히로시마 첫 원폭투하의 뒷 이야기
새삼스럽게 역사의 뒤안길을 재조명한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때를 기준점으로 일본 제국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삼국동맹(나치, 이탈리아, 일본)을 맺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철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였다.(일본은 철을 70%, 석유를 77%정도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이에 큰 타격을 입은 일본은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 공습을 강행하였다.
*당시 일본은 국력으로 미국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석유와 철강을 수입하기 위해선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에서 철수해야만 하는데 당연히 일본은 중국에서 철수를 할 수 없었다.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선 미국과의 싸움은 불가피 했고,진주만 공습이 무식한 결정이였다는 것은 당시배경으로는 절대 아니었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미국대사가 미국 정부에 알렸으나,미국은 이것을 묵살하였고,결국은 3600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과 나치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됬지만,1942년, 독일은 소련을 깔아 뭉게고 있었고,일본은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이미 장악했다.
추축국이 매우 우세한 상황이였지만,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10월엔 독일이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1943년 2월, 추축국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과달카날 전투에서 밀림으로서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이후, 6월 6일, 연합국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실행하고 6월 22일 소련이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을 침공함으로서 독일은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1945년 5월 7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고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서쪽과 같이 동쪽의 승리도 이끌어 내야 합니다“
-핸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그렇게 쉽진 않았다.
미국이 새롭게 개발한 B-29는 8000Km 이상을 이동할 수 있고,10톤에 가까운 폭탄을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전략 폭격기 였다.
1944년 6월 부터 만주와 태평양의 섬들을 폭격했고 11월 부턴 사이판과 괌 에서 일본의 본토를 폭격했는데,이 사이에 있던 이오 섬에서 B-29의 진로를 방해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이오섬을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이오지마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작은 섬인 이오 섬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이 전투에서 미국군은 일본군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었고,7000명의 사망자와 19000명에 이르는 부상자를 내게 된다.
일본은 패전의 기색이 역력한 데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하였고,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국은 또 다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힘겹게 승리하자 미국은 상당히 다급해졌다.
그리고, 7월 17일.
트루먼 대통령은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아인슈타인이 엄청난 위력의 폭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의해 비밀스럽게 시작된 프로젝트다.
*워낙 비밀스러워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몰랐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이 함께 연구한 이 계획은 20억 달러를 투입함으로서 핵폭탄을 개발해냈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사막에서 핵폭탄 실험은 결국 성공해 내고 말았다.
1945년 7월 24일,슬슬 소련이 전쟁에 끼어들려고 하자 미국은 원자폭탄 투하를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여러가지 이유도 있지만,20억 달러를 부어서 겨우 만든 폭탄을 쓰지않고 내버려두면 훗날 정치적으로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
그리고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이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투하를 결정했음에도, 항복을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 하다고 판단하여 이것을 거부하게 된다.
원자폭탄 투하 장소는 여러가지 조건으로 좁혀졌다.
-목표 도시에 원폭 투하를 할 시, 효과적인 손해를 입을 수 있는지
-큰 도시이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인지
등등 여러가지 조건의 맞는 도시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날짜로부터 72년 전. 이른 아침,
‘에놀라 게이‘ 라는 이름을 가진 B-29 폭격기가 소년(Little Boy)이라는 이름을 가진 원자폭탄을 가지고 일본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고,이오 섬에서 폭발을 관찰할 정찰기 2대를 동행하고
히로시마로 향하였다.
히로시마는 평지 지역 이였고, 피해를 관찰하기가 쉬었다.그렇기에 히로시마에 투하하는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죽음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에놀라 게이에 탄 승무원은 히로시마 상공에서 리틀보이를 투하한뒤,혹시모를 위험을 대비해 빠르게 대피했고, 이내 엄청난 폭발을 봤다.
폭탄이 터진 근처는 온도가 4000도에 육박했다.사람들은 뼈도 남지 않고 그냥 녹았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눈이 멀었다.
뒤이어 엄청난 열풍이 주변을 휩쓸었고,근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군인 2만여명,민간인 10만여명에 조선인 3만여명 역시 사망했다.
이 원자폭탄이 터지고 난 이후 3일뒤, 나가사키에 한발이 더 떨어졌고.
일본은 결국 항복하게 된다.[출처] [히로시마 원자폭탄 72주년] 투하되기까지의 과정|작성자 전략가 (bokdea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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