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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명인 장사익 소리꾼을 찾아서
등록일: 2010-12-25 , 작성자: 광진의소리 , 메모(출처): , 초대자:
섬
장사익
순대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 기댈 벽 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개 섬이다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개 섬이다.
출처 : 처음 느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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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으로 토하는 한국인의 숨결소리
삶, 죽음, 자연을 2007.6월 아메리카 대륙에 울릴터
우리시대 명인 소리꾼 장사익
대담: 유윤석 한국화보 편집국장(현 광진의 소리 편집국장)
정리: 김영현 기자
사진: 고희석 기자
태평소의 한국적 감성을 암울했던 시대의 무거운 짐을 벗는 레퀴엠으로 해원하려 했을까.
민중가요가 수명을 다해갈무렵,서해바다를 서민들의 삶터로 끌어오는 충남 광천읍내 갯것장터의 비릿내음으로 천지를 울리며 한 소리꾼이 나타났다.
죽은 이를 위한 진혼곡,만가(挽歌)로 해원의 씻김을 하려는 몸짓어었을까. 한국인의 서정을 깊은 심장에서 울궈내는 소리의 명인 장사익! 어린시절 아버지의 장고장단에 흥얼거리며 자랐던 장사익은 태평소가 간직한 우리 소리에 몹시도 갈증을 느꼈다던 그는 늦깎이 음악시인이다.
권위주의의 암흑시절, 민중의 희망을 노래했던 민중가수들의 처절한 소리가 민초들에게 자유와 인권,생명을 노래했다면 그는 폭압과 권위의 짓누름이 걷히고 허탈한 가슴을 쓸어안고 봄같지 않은 봄이 만연할 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한국적 한과 서정을 깊은 시심으로 폐부를 짜서 우려낸 소리로 민주화시대,민중시대이후의 새로운 역사소리의 지평을 열었다.관조의 경지에 들어선 그는 이제 태평양을 건너 뉴욕,워싱턴,시카고,LA 등 팝의 메카 아메리카 대륙에 ‘한국의 소리마당을 펼치기 위한 대장정’을 준비하고 있다.한국화보 독자들을 위하여 본지는 “장사익 선생 자택에서 독점인터뷰”시간을 마련하였다.<편집자 주> | 인왕산 북한산을 좌우로 펼친 홍지동 산꼭대기
홍지동 홍지동 산꼭대기에 담갈색 3층집을 찾는데 한참을 헤멨다.장사익 선생의 자택이다.사모님의 전화안내를 받고 이리저리 돌다가 산밑에 이르렀는데 “흰색차량이 맞죠?”하며 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울렸다.정말 반가운 목소리였다.
사모님과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2층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감탄사가 터졌다.탁트이는 눈앞에 좌우로 인왕산과 북한산이 떡!버티고 있잖은가! 한국의 소리를 다듬고 빚어 엮어내는 이 시대 명인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영감을 샘솟게 하는 “영터”가 아닐까며 뇌아렸다.
-.선생님,곡을 준비하시면서 답답하실때는 주로 어디로 가십니까?
기자는 속으로 지리산,태백산,한라산.계룡산이 아닐까 싶었다.
“저는 소리를 만들면서 가슴이 답답할때는 고향인 광천의 읍내 갯것장터를 자주 찾습니다.싱싱한 갯것이랑,온갖 곡식,채소를 옹기종기 내놓고 파는 장바닥 아낙내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흥얼흥얼하고 다니다 보면 막혔던 가슴이 풀리면서 ‘소리’가 다듬어지거든요” 그래서 “파 한 단 사세요!”가 “희망 한 단 사세요”가 된 것일까!
“저에 아버지는 장고를 잘 하셨어요.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면 아버님은 신명나게 장고를 치셨거든요.” 아버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린시절 웅변으로 다져진 목소리는 점차 우리의 “소리”에 자석처럼 끌려 태평소로 각종 농악경연대회를 휩쓸며 음악계에 입문하기에 이른다. 60~70년대 한국음악이 전성기를 맞으며 대중 속으로 파고들 무렵, 정치적 억압으로 80년대 민중가요로 대표되던 시기를 지나 장사익은 우리의 소리와 신생한 대중음악을 믹스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게 된다.
9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대중음악의 神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불었던 그는, 이후 해외 오케스트라 협연과 기타, 피아노 등, 대중음악과의 조우를 시험해 해외에 우리의 것을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그의 심오한 시적 가사와 곡을 하듯 토해내는 독특한 창법이 현지 교민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현지인에게는 한국의 투박하고 한을 품은 듯 애절한 느낌의 음악적 감성 또한 그네들의 정서에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40대 중반부터 예순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총 5집을 발표하면서 그는 삶과, 죽음, 자연을 위주로 곡을 썼다. 주로 詩에서 곡을 따온다는 그는 제목부터 요즘 대중음악과 다른 느낌이다. 가장 힘이 느껴지는 음반으로 1집을 꼽은 그는 “가장 파워풀하고 객기가 들어있는 음악.”이라고 평할 만큼 삶과 죽음, 그리고 자연을 힘 있게 불렀다.
특히 상여가 나가는 만가(상여소리)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하늘 가는길”은 장장 10여분에 걸쳐 죽음에 대한 정서를 토했다. 그의 노래를 이처럼 “토 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열정이 깊이가 너무나 깊어 그저 “노래했다”라고 하기엔 한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가 집에서 곡을 하는 사람은 설움에 온몸을 내던져 울지요, 그것은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분출 되면서 결국엔 후련해지는 것입니다.”장사익의 소리에 대한 견해다. 이 같은 설움이 곧 후련해짐으로 이어지는 것, 즉 살풀이나, 씻김 굿, 고풀이처럼 그의 소리는 우리네가 반만년동안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그토록 토해내려 했던 것이다.
그의 음악적 사상을 이해하려면 이 같은 한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그의 팬 층이 기성세대위주인 이유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은 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해요, 대중음악이 너무 사랑에만 치우쳐서 저 같은 삶, 죽음, 자연은 그네들 정서에 맞지 않죠.”자조 섞인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편, 음악은 어디까지나 오디오이지 비디오가 아니라며 요즘 눈요기 거리의 립싱크 대중가수를 질타하기도 했다. | 태평소로 국악마당에 , 늦깍기 소리꾼으로!
선생님은 -.선생님은 1980년 서른 초반에 데뷔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녀유.94년 늦가을,제가 46살때죠.하하하..군을 제대하고 카센터,보험회사 직원 등 전전했시유.1980년에는 제가 새납 태평소를 들고 국악판에 연주자로 처음 끼어든거죠.입문이지 데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94년이라고 봐야 돼유.” 그는 한때 농악판 뒷풀이 “판막음”으로 이름을 떨쳤던 재야 소리꾼이기도 했다.
판막이는 최고의 소리꾼 몫이다.판의 대미를 장식하고 무대를 마치는 게 “판막이”다. 그는 “정말 자기가 꼭 하고 싶은 것을 ‘꿈’으로 하고 그 꿈을 접지말고 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태평소가 그리웠던 그는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뛰쳐나와 서울의 학원가에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문한 소리꾼이 오늘날 한국의 소리를 대표하는 거물이 될 수 있었던이다.
“사람은 꿈이 있어야 되요, 꿈을 꼭 가꿔야 합니다.어떤 인기나 명예에 편승하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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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팬들은 ‘장르‘에 대해 해석이 분분합니다.
“저는 그저 제 한을 노래합니다. 그것을 듣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몫인 겁니다.” 며 퓨전자체도 하나의 장르임을 역설하였다.
-.선생님의 창법은 워낰 독특해 후진들이 뒤를 잇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진양성이요?, 소리 내는 법은 가르칠 수 있지만, 그게 어디 되겠습니까.
그게 한국의 소리가 갖는 ... 자기 삶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죠.”
한국인의 정서를, 한을 인위적으로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우쳐 주기를 바랬다. 뒤를 이어줄 후계자도 스스로 한을 느끼고 경험하기를 바라는 듯.
부모님 살아생전에 자신의 하늘을 덮어주던 그 보호막이 사라지던 날, 그 자신이 도리어 보호막이 되면서 좀 더 하늘과 맞닿아 간다는 그는, 그의 앨범에서도 알 수 있듯이 1집부터 5집 사이의 정서는 점점 하늘과 맞닿아가는 느낌이 든다.
5집은 1집보다 더욱 성숙한 느낌의 인생관을 담았다는 평이 실감이 났다.제5집 이후의 계획을 물었다.
“삶, 죽음, 자연을 혼백으로 토하는 한국인의 숨결소리를 미국에 가서 낼려고 합니다. 25명의 스텝진이 함께하는 저에 단독무대죠. 제가 독일공연에서 교포청중들이 ’스폰지‘였다는 감동무대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교포들이 ’한국의 소리‘에 얼마나 목말라하는가 그 현장을 봤거든요. 물론 미국시민들에게도 우리 한국의 소리에 대해 그 진면목을 보여줄 거구요.“ | | 본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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