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諡號) 능호(陵號) 전호(殿號)
등록일: 2012-09-19 11:38:14 , 등록자: 김민수 시호(諡號) 능호(陵號) 전호(殿號)
1897년 1월 3일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영수(金永壽)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생각건대 우리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지극히 어질고 성스러운 덕을 역사에 모두 적을 수 없습니다. 30년 동안 백성을 길러 준 공적과 온 나라가 빛나게 입은 교화는 백세토록 영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고에 없는 큰 변을 당하였으니 신민의 원통한 마음은 천지에 끝이 없습니다. 만약 그 아름다운 공렬을 드러내서 영원토록 서운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오직 시호(諡號)를 올리는 큰 의식과 전침(殿寢)의 전호(殿號)를 올리는 것뿐입니다.지난해 겨울에 의논하여 정할 때 역신(逆臣) 김홍집(金弘集)이 그 일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지금까지 분해하고 있습니다. 대행 왕후의 밝은 영령이 있다면 어찌 편안하게 받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 때 의식 절차가 미비해서 공경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 데서 모자람이 있었으니, 인정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陛下)께서는 특별히 살피시고 속히 명을 내려 참가하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곧 세 가지 존호(尊號)를 다시 정하도록 함으로써 장례는 의식 절차에 결함이 없게 해 주신다면 실로 인정상이든 예의상이든 모두 다행이겠습니다.”하니, 고조 광무제가 비답하기를“지난해 겨울에 역신이 그 일을 주관하여 장례의 옛 법을 어지럽게 바꾸었으니 유감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짐(朕)은 더욱 슬프다. 오늘 이 노성한 사람의 충성스러운 말이 이처럼 밝고 바르니 대행 왕후의 시호(諡號), 능호(陵號), 전호(殿號)를 다시 의논하여 정하겠다. 경은 그리 알라.”하였다.조령을 내리기를,“중신(重臣)의 상소이 있었으니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諡號), 능호(陵號), 전호(殿號)를 다시 의정(議定)하도록 하라.”하였다.
1월 4일 장례원(掌禮院)에서 보고하기를,“대행 왕후의 시호(諡號), 능호(陵號), 전호(殿號)를 의논하는 길일을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받도록 하니 1월 6일이 좋다고 합니다. 이 날로 거행합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존호(尊號)를 의논할 때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부(府)와 부(部)의 협판(協辦) 이상, 관각(館閣)의 당상(堂上官), 본원(本院) 당상(堂上), 봉상사(奉常司) 제조(提調) 1인(人)과 장(長)이 함께 참가하여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1월 6일 의정부(議政府)에서 대행 왕후의 시호(諡號) 망은 ‘문성(文成)’온 천하를 경륜하는 덕을 갖춘 것을 ‘문(文)’이라고 하며 예악을 밝게 갖추고 있는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명성(明成)’온 천하를 굽어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예악을 밝게 갖추고 있는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인순(仁純)’어진 일을 하고 의로움을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며 중정(中正)의 덕을 갖추고 화락(和樂)한 것을 ‘순(純)’이라고 한다.로 하고, 능호(陵號)의 망은 ‘홍릉(洪陵)’, ‘희릉(熹陵)’, ‘헌릉(憲陵)’으로 하며 전호(殿號)의 망은 ‘경효전(景孝殿)’, ‘정효전(正孝殿)’, ‘성경전(誠敬殿)’으로 상주(上奏)하였는데, 모두 수망(首望)대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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