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海溢) 풍재(風災) 한재(旱災) 지진(地震)
등록일: 2012-11-13 10:47:30 , 등록자: 김민수 해일(海溢) 풍재(風災) 한재(旱災) 지진(地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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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5월 6일 태조가 한재(旱災) 때문에 태묘(太廟)와 사직(社稷)에서 비 오기를 빌었다.5월 9일 왕사(王師)를 청하여 비 오기를 빌게 하고, 태일성(太一星)을 소격전(昭格殿)에서 초제(醮祭)하여 비 오기를 빌었다.1405년 12월 17일 동북면(東北面)과 풍해도(豐海道)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미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막기 위해 산천(山川)에 빌도록 명하였다. 태종이 예조(禮曹)에 명하기를, “근년(近年)에 계속하여 수재와 한재가 있었는데, 동북면과 풍해도가 더욱 심하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서 미리 빌어야 한다.”하니, 예조에서 청하였다.“명년 2월 외산제(外山祭) 때에 옛날 산천(山川)에다 영제(禜祭)를 지내던 예(例)를 써서 빌으소서.”1406년 5월 11일 동북면 순문사(東北面 巡問使)에게 명하여 지성으로 비를 빌도록 하였다. 전교하였다.“근년에는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달아서 백성들이 일정한 생업을 잃으니, 진실로 가엾다. 구름과 비를 일으키는 것은 큰 산 악(岳) · 큰 강 독(瀆)에 힘입으니, 비록 사전(祀典)에 실리지 아니하였을지라도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전물(奠物)을 정하게 갖추고 도순문사가 지성으로 재계하여 친히 제사를 드려 나의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1407년 6월 28일 태종이 의정부사(議政府事)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원단(圓壇)에 비를 빌었다.7월 3일 김포(金浦)·통진(通津)에서 남양(南陽)·수원(水原)과 연안(延安)·배주(白州) 등에 이르기까지 연해(沿海) 14고을에 조수(潮水)가 물이 범람하여 넘치는 창일(漲溢)하여 화곡(禾穀)을 손상시켰다.7월 21일 해주(海州)에 한꺼번에 밀려오는 바닷물 조수(潮水)가 넘쳤다. 세종 6(1424)년 11월 20일 경기의 안산(安山)·수원(水原)·인천(仁川)·부평(富平)·강화(江華) 등지에 해일이 일어나 혹은 2백여 보(步), 혹은 1백여 보, 혹은 50여 보가 물에 잠기었다.1470년 6월 3일 성종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하서(下書)하기를,“듣건대 도내(道內)의 연해(沿海) 여러 고을에 해일(海溢)이 많이 볏곡식을 손상시켰다고 하니, 경(卿)이 친히 그것을 살펴서 아뢰어라.”하였다. 중종 14(1519)년 8월 21일 충청도 연해변 홍주(洪州) 등 열 한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명종 6(1551)년 8월 3일 경기도 안산(安山)에 동남풍이 크게 불어 해일(海溢)이 일어나 들이 물에 잠겼다.명종 11(1556)년 9월 18일 황해도 옹진(甕津)·장연(長淵)에 천둥이 치고 청홍도(淸洪道) 직산(稷山)과 경기 안산(安山)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1557년 4월 3일 전라도 감사 권철(權轍)이 치계(馳啓)하였다.“나주(羅州)·진도(珍島)·영암(靈巖)·임피(臨陂)·해남(海南)·함평(咸平)·무장(茂長)에 이번 4월 3일에 비바람이 크게 불고 해일(海溢)이 일어나 뚝방이 무너져서 짠물이 들어와 벼싹이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매우 참혹합니다.군관 김일(金馹)이 와서 고하기를 ‘3일 수토(搜討)하기 위해 고리포(古里浦)에 갔더니 갯가에 사는 80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나와서 내가 해변에 거주한 지가 이제 80여 년인지라 평상시 기운만 보아도 바다에서 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안다. 근일 바다 가운데의 여러 섬과 강변이나 산골짜기에서 소리가 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풍수(風水)의 큰 변이 곧 발생할 것이다. 장사(將士)는 부디 배에 오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 삼경(三更)에 풍파가 크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판옥선(板屋船)과 전선(戰船) 등이 폭풍 때문에 모두 떠내려갔고, 격군(格軍) 무동(茂同)이 헤엄을 잘 치는 것을 믿고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가 방향을 잃고 기진해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함열(咸悅)에서도 같은 날 해시(亥時)에 비바람이 크게 일고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큰 것은 도토리와 비슷한 개암과 비슷했습니다. 또 4일 밤에도 해일이 있었으니 비상한 재변입니다. 논밭이 모두 물에 잠겨 전혀 추수의 희망이 없으니 매우 걱정이 됩니다.”
4월 4일 함경도 함흥(咸興)에 천둥, 번개가 치고 북풍이 크게 불었으며 물을 쏟아붓 듯이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새 알과 비슷하고 작은 것은 개암이나 콩과 비슷했다. 청홍도 서천(舒川)에는 조수가 범람하여 해변의 언답(堰畓)을 덮친 것이 3백여 결(結)에 이르렀다. 평안도 용천(蘢川)·창성(昌城)·곽산(郭山)에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크기는 콩만하였다. 의주(義州)에서도 천둥 번개 뇌전(雷電)이 크게 치면서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큰 것은 개암과 비슷하고 작은 것은 콩과 비슷했으며, 경내(境內)의 금강산 근처에는 눈처럼 쌓였다. 해일이 들판에까지 넘쳐 들어와서 끝없는 홍수처럼 출렁거렸는데 며칠이 되어도 빠지지 않았으니 근래에 듣지 못하던 일이었다. 경기 금천(衿川)에도 천둥이 치면서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크기는 콩만하였다.5월 16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全羅)·청홍(淸洪)·경기(京畿)·황해(黃海)·평안도(平安道) 등의 해변 고을에 해일(海溢)이 일어난 곳이 많습니다. 해일이 있게 되면 전답이 모두 짠물에 잠겨 오곡(五穀)이 자랄 수 없으므로 2∼3년 동안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그곳의 백성들이 생활해 갈 수 없으므로 모두 유산(流散)되게 됩니다. 해변의 고을은 모두 방어에 긴요한 곳인데 백성들이 유산되면 방어할 수가 없게 되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해일이 일어난 각 고을의 백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어루만져 돌보아주어 유산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각도 감사를 시켜 해일의 피해를 입은 민호(民戶)의 남녀 숫자 및 장정과 노약자를 자세히 뽑아서 아뢰게 한 다음 전세(田稅)와 공물(貢物), 잡역(雜役) 등을 상의하여 감면해줌으로써 유산하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보살펴 주는 계책에 대해서 감사에게 마련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아울러 백성들의 실정도 조사하여 시행할 만한 방법이 있으면 또한 자세히 기록해서 아뢰도록 하라고 하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명종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11월 30일 밤에 지진이 일어나 집들이 온통 흔들렸다.
1580년 6월 1일 비로소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넘쳤고 해일(海溢)이 있었으며 산이 무너지고 가옥이 떠내려갔다. 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에 돌림병이 치성하여 백성들이 대부분 사망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올해의 수재는 옛날에 비해 더욱 심하여 외방의 계문이 극히 괴이합니다. 도성 안에도 하룻밤 사이에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평지에 한 길이 넘는 물이 찼고 교량이 무너지고 도로가 파괴되었으며 가옥이 떠내려갔는데 치어서 다치거나 빠져 죽은 사람의 수를 알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교외의 무덤들이 무너져 백골이 드러났으므로 삼태기를 가지고 묻는 자들이 서로 연달았습니다. 논밭의 곡식이 모두 매몰되고 채소밭은 남은 것이 없는 등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 듣고 보기에 참혹하고 측은합니다. 재변은 아무 이유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대응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스스로 닦고 살피소서.”하자, 선조가 답하기를,“올해의 수재는 매우 놀랍고 해괴해서 나도 두렵고 걱정스럽다. 다시 더욱 반성하도록 하겠다.”하였다.
1610년 10월 19일 전라도 해안가에 해조(海潮)가 범람하였다.1626년 7월 17일 평안도에 풍재(風災)와 해일(海溢)이 있다고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1627년 7월 14일 경기의 인천(仁川)·부평(富平)·안산(安山)·광주(廣州)·파주(坡州)·여주(驪州)·양근(楊根)·가평(加平)·삭녕(朔寧)·고양(高陽)·영평(永平)·진위(振威)·마전(麻田)·연천(漣川)·교하(交河)·과천(果川) 등지에 사나운 바람과 심한 비가 밤낮으로 번갈아 일어나서 곡식이 모두 쓰러졌고 인천·부평·안산 등 세 고을에 해일의 변까지 겹쳤다.1629년 6월 16일 교동(喬桐)에 큰 바람이 불고 해일이 있었다고 감사가 아뢰었다.7월 18일 경기 지역의 수원(水原)·남양(南陽)·교동(喬桐) 등지에 해일(海溢)이 일어나고, 인천(仁川)·진위(振威)·이천(利川) 등지에는 풍재(風災)가 발생해 곡식이 피해를 입었으며, 광주(廣州)에는 황충(蝗虫)이 온 들판을 덮었다.7월 26일 공청도(公淸道)의 천안(天安)·신창(新昌) 등 지역에 해일(海溢)이 일어나고 큰바람이 불어 벼가 모두 상했다. 청주(淸州) 지역에는 큰 바람이 불어 곡식이 손상되었다.1631년 10월 14일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 해일(海溢)이 일어나고, 태천현(泰川縣)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10월 16일 황해도 해주(海州)와 연안(延安)에 해일이 일어났다.
1647년 7월 16일 평안도 안주(安州)·정주(定州)·선천(宣川)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해일이 일어났다.8월 11일 경기의 부평(富平)·안산(安山)·김포(金浦) 등 여러 고을에 7월 2일에 해일이 일어났고, 7월 27일에는 경기의 양주(楊州)·이천(利川)·여주(驪州)·양근(楊根)·지평(砥平) 등 여러 고을에 우박이 많이 내렸다. 8월 18일 평안도에 우박이 내리고 큰물이 지고 해일이 일었으며, 함경도에 큰물이 졌다. 황해도에 큰물이 져 봉산군(鳳山郡)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20여 인이었다. 9월 11일 충청도 서천(舒川)·평택(平澤)·아산(牙山)·신창(新昌)·직산(稷山) 등 고을에 큰물이 지고 해일이 일었다. 1648년 8월 4일 홍청도 아산(牙山)·신창(新昌)·덕산(德山)·천안(天安)·평택(平澤) 등의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어 바닷가의 제언이 무너져 모두 침몰되었다. 임천(林川)·한산(韓山)·청주(淸州)·보은(報恩)·옥천(沃川) 등의 고을에는 태풍과 폭우가 쏟아졌는데,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 양남(兩南)의 풍재와 같은 날의 일이다. 옥천의 화인진(化仁津)에는 나루의 물이 크게 불어나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유생 박희태(朴希泰) 등 같은 배에 타고 있던 12인이 모두 익사했다.
효종 즉위(1649)년 11월 6일 전남도(全南道)의 부안(扶安)·함열(咸悅)·옥구(沃溝)·무장(茂長)·만경(萬頃)·고부(古阜) 등 여섯 고을에 해일(海溢)이 발생하고, 여산(礪山)과 함열에는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1651년 8월 1일 황해도 해주(海州) 등 여섯 고을에는 해일이 일었고, 봉산(鳳山) 등 일곱 고을에는 폭풍이 불고 큰물이 졌으며 황충(蝗虫)이 있었다. 8월 11일 황해도 연해안의 여러 읍에 해일이 있었다.1654년 11월 19일 전남도에 해일이 있었다.1656년 6월 1일 충청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1657년 8월 1일 충청도에 해일이 일었다.
현종 3(1662)년 10월 10일 호서(湖西) 면천군(沔川郡)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1663년 6월 25일 충청도 아산(牙山)·신창(新昌)·홍양(洪陽) 등 읍에 3일 간 해일(海溢)이 일어났다.1665년 7월 17일 광주(廣州)에 해일과 태풍이 있었다.7월 18일 충청도 아산(牙山)·신창(新昌)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1일 수원(水原)·인천(仁川)·남양(南陽)·안산(安山)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4일 평안도 산간 지대에 있는 고을과 해안에 있는 고을에 홍수와 해일이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려가고 모래가 날고 돌이 굴렀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7월 28일 영광(靈光) 등 16개 고을에 해일이 있었다. 1666년 6월 22일 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 등지에 해일이 있었는데, 사람이 휩쓸려 죽고 민가가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다. 1668년 6월 3일 정주(定州)·가산(嘉山)·선천(宣川)·삼화(三和)·용천(龍川)·박천(博川)·용강(龍岡)·숙천(肅川)·곽산(郭山)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6월 23일 평안도 철산(鐵山)에 바닷물이 크게 넘치고 지진이 일어나 지붕의 기와가 모두 기울어졌으며, 사람이 더러 놀라서 엎어지기도 하였다. 평양부(平壤府),황해도 해주(海州)·안악(安岳)·연악(延安)·재령(載寧)·장연(長連)·배천(白川)·봉산(鳳山), 경상도 창원(昌原)·웅천(熊川),충청도 홍산(鴻山),전라도 김제(金堤)·강진(康津) 등에 같은 날 지진이 있었다. 예조가 중앙에 단(壇)을 설치하고 향과 폐백을 내려보내어 나라에서 괴이한 사건이 생겼을 때에 지내던 제사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를 청하니, 현종이 따랐다.
1669년 7월 28일 평안도·황해도에 해일이 있었다. 8월 1일 경기 수원(水原) 등지의 일곱 고을에 7월 17일 해일이 있었다. 8월 2일 전라도 부안현, 강화부에 해일이 있었다.8월 3일 충청도에 해일이 있었고 또 홍수가 났다. 8월 14일 전라도 옥구(沃溝)·임피(臨陂)·영광(靈光)·장흥(長興)·함평(咸平)·영암(靈巖)·순천(順天)·강진(康津)·해남(海南)·나주(羅州)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1671년 2월 1일 강화부에서 해일이 있었는데 조수가 들이치는 것이 석 자쯤이나 되기도 하였고 각처의 둑도 많이 무너졌다.11월 26일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해일이 일어 민가 1백여 호가 가라앉았다.1681년 5월 25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가 이달 초 5일에 의주(義州)에서 해일(海溢)이 있었고, 이산(理山)에 우박(雨雹)이 내렸다고 계문(啓聞)하였다. 1687년 6월 28일 전라도(全羅道)의 흥덕(興德) 등 11고을에 해일(海溢)이 일었다. 1691년 11월 3일 관북(關北)에 천둥치고 해일(海溢)이 일어났다.1695년 6월 29일 충청도 당진(唐津)·서천(舒川) 등지에 해일(海溢)이 있었다.1697년 8월 19일 경기(京畿) 안의 여러 고을에 잇따라 해일(海溢)이 일어나 포구(浦口) 변두리의 각종 곡식이 많은 손상(損傷)을 입었으며, 아산(牙山)·당진(唐津) 등의 고을에서도 해일이 일어났다.1699년 5월 2일 해주(海州)와 개성부(開城府)에서 조수(潮水)가 창일하였고, 강화부(江華府)에서는 태풍이 불고 해일(海溢)이 있었다. 강원도(江原道) 철원(鐵原)·금성(金城)에서는 우박이 내렸고, 충청도(忠淸道) 한산(韓山)에서는 해일이 있었다. 평안도(平安道) 강계(江界)에서는 눈이 내렸고, 창성(昌城)에서는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장연(長淵)에서는 서리가 내렸다.
1701년 7월 22일 충청도 신창현(新昌縣)에 해일(海溢)이 있었다.1702년 5월 16일 평안도 선천(宣川) 등 12고을에 우박이 내리고, 박천(博川) 등 두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으며, 강계부(江界府)에서는 사람과 가축(家畜)이 벼락 맞아 죽었다.7월 13일 경기(京畿)의 광주(廣州) 등 23고을이 바람과 우박의 재해(災害)를 참혹하게 입었고, 교동(喬桐)·양성(陽城) 두 고을은 해일(海溢)이 있었으며, 함경도(咸鏡道)의 종성(鐘城) 등 고을에도 우박의 재해가 있었다.10월 17일 경기(京畿) 교동부(喬桐府)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11월 28일 강원도(江原道)에 해일(海溢)로 인해 표몰(漂沒)한 인가(人家)가 많았다. 1703년 4월 18일 충청도 보령현(保寧縣)에서 해일(海溢)이 일어났다.6월 16일 평안도 박천(博川)·가산(嘉山)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는데 다른 도(道)에서도 장문(狀聞)하였다.11월 3일 황해도 연안(延安)에 1장(丈) 남짓한 높이의 해일(海溢)이 일어났다.1705년 6월 19일 영암(靈巖) 등에 16일부터 이날까지 해일(海溢)이 있었다.1709년 7월 28일 충청도 덕산(德山) 등 11고을에 해일(海溢)이 일고, 대흥(大興) 등 세 고을에도 해일이 일었고, 황해도 은율(殷栗) 등 세 고을에도 해일이 일었으며, 게와 벌레의 재해가 생겼다.1712년 11월 2일 평안도 함종(咸從)·증산(甑山) 등지에 해일(海溢)이 일어나 익사한 백성이 있었다.1713년 6월 29일 충청도 홍양 등지에 해일(海溢)이 있었다.7월 12일 전라도 영광(靈光)에 해일(海溢)이 있었다.7월 17일 경기 부평(富平)에 해일이 있었고, 여주(驪州)·양천(陽川)·가평(加平) 등지에 충재(蟲災)가 있었다. 7월 29일 전라도·경기 각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전라도 영광·함평(咸平) 등지에 해일(海溢)이 있었고, 경기 광주(廣州)에는 서리가 내렸다.1714년 7월 23일 경기(京畿) 수원(水原) 땅에 해일(海溢)이 일어났고 교동(喬桐)에는 이충(泥蟲)이 크게 발생하였다.9월 6일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1724년 5월 2일 강화(江華)·교동(喬桐)에 해일(海溢)이 있었다.5월 3일 황해도·평안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1725년 7월 22일 경기(京畿) 수원(水原)에 해일(海溢)이 있었다.1726년 8월 3일 청주(淸州)·공산(公山)·직산(稷山)·단양(丹陽) 등지에 큰물이 지고, 당진(唐津)에는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1727년 3월 15일 평안도의 중화(中和) 등 네 고을에 모진 바람이 연일 크게 불어 박천(博川)에서는 해일(海溢)하여 연안(沿岸)의 민가가 많이 침몰하게 되고, 공사(公私)의 언답(堰畓)이 모두 파괴되었다. 1732년 6월 6일 영조가 전교하기를,“희생(犧牲)을 대신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었으나, 미미한 정성이 이르지 않아 비가 내릴 뜻이 더욱 멀어진 듯하다. 저 농민(農民)을 생각하면 조처할 바를 모르겠다.”하고, 이에 계해일(癸亥日)에 남교(南郊)에 대신을 파견하여 우사(雩祀)를 지내게 하고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게 하였다.9월 24일 영광군(靈光郡)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1734년 6월 29일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1735년 5월 12일 평안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5월 23일 양서(兩西) 지방에 해일이 있었고, 전광도(全光道)에 우박이 떨어졌다. 1741년 7월 18일 충청도의 비인(庇仁)·평택(平澤)·직산(稷山)·서천(舒川) 등 네 고을에서 해일(海溢)이 발생하였다. 7월 19일 강원도의 평해(平海) 등 아홉 고을에 바닷물이 줄어들어 육지와 같이 편편해졌다가 얼마 후에 물이 육지로 넘쳐 들어 하루에 번번이 7, 8차례나 넘어드니 바닷가의 인가(人家)가 많이 표몰(漂沒)되었고 주즙(舟楫)이 파손되었다.7월 27일 경상도 창원(昌原)·김해(金海) 등의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9월 16일 공홍도(公洪道) 평택(平澤) 등지에 해일(海溢)이 발생하여 평지(平地)에 수심(水深)이 한 길 남짓이나 되었다.9월 18일 천안현(天安縣)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1743년 6월 11일 평안도 삭주(朔州)에는 한재가 심하고, 은산(殷山) 등 세 고을에는 충재(蟲災)가 있고, 철산(鐵山)에는 해일(海溢)이 있었으며, 이산(理山) 등 15고을에는 큰 우박(雨雹)이 농작물에 끼치는 재해 박재(雹災)가 있었는데, 도신이 계문(啓聞)하였다.1744년 8월 9일 공홍도(公洪道) 연해의 고을에서 해일이 있었고, 이산(尼山)과 연산(連山) 등의 고을에서는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은은(隱隱)하게 동쪽 방향에서 일어나 서쪽 방향에서 멈추었다.8월 11일 해남(海南)의 연해 고을에서 해일이 일었고, 또 충재(蟲災)가 있었다.1756년 8월 3일 김제·만경·임피 세 고을은 바닷가의 땅이다. 바닷물이 갑자기 넘쳐 각종 곡식이 물에 잠겼는데, 모양이 마치 소금에 저린 채소와 같았으니, 전라 감사가 그 일을 장문(狀聞)하였다.1757년 7월 1일 전라도 해남(海南) 등 네 고을에 해일(海溢)이 있었고, 순천(順天)에는 벼락을 맞아 죽은 자가 있었다. 1761년 7월 28일 영암(靈巖) 등 고을에 해일(海溢)과 벌레와 게가 재해를 입혔으며, 삼화(三和) 등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다.
1790년 7월 10일 해일(海溢)이 있었다. 교동 수사(喬桐 水使) 남헌철(南憲喆)이 치계하기를,“6월 17일 자시(子時)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고 동남풍이 강하게 불었습니다. 마침 조수가 높은 때라 파도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으며 바닷가의 제방 중 곳곳이 무너지고 터졌습니다. 마을이며 들판에 짠물이 넘쳐 온갖 곡식이 김치를 담근 것처럼 절여졌고 민가 10호가 물에 잠겨 무너지고 깔렸습니다. 송가도(松家島)는 모든 곡식이 완전히 물에 잠겨 이미 남은 희망이 없게 되었고 민가 61호가 침몰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아이 2명과 여자아이 3명이 익사하였습니다.”하니, 정조가 전교하기를, “각도의 농사가 다행하게도 좀 잘될 가망이 있었는데, 본 수영은 바닷가에 위치한 곳으로서 유독 침몰의 화를 입었으니 백성들의 사정이 극히 측은하다. 수해를 입은 민호로서 신역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공사간의 당년 신역과 조세를 견감해주고, 신역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별도로 혜택을 주어 안정시키라. 소금가마에 대한 균역청(均役廳)의 세도 구분하여 탕감해 주라.”하였다.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이 장계하기를, “교동(喬桐)·부평(富平)·김포(金浦)·인천(仁川)·안산(安山)·통진(通津)·풍덕(豊德)·영종(永宗) 등 8개 고을과 진(鎭)은 이달 17일 조수가 불어났을 때 동풍이 갑자기 불며 파도가 높이 밀려오는 통에 바닷가의 제방이 충격을 받아 파손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짠물이 넘쳐서 모든 곡식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교동에서는 무너지고 깔린 민가가 71호이고 부평 석관면(石串面)과 모월관면(毛月串面)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무너지고 터진 제방이 모두 51개소나 됩니다. 피해를 입은 밭은 40여 섬지기나 되며, 파괴된 소금가마는 20개 정도됩니다. 김포의 검단면(黔丹面)은 여러 곳에 제방을 쌓았지만 피해를 입은 전토는 모두 58섬지기이며, 민가 3호도 무너지고 깔렸습니다. 그리고 소금가마가 9개 정도 파괴되었습니다. 인천·안산·통진·풍덕·영종 등 5개 고을과 진의 바다를 낀 여러 면에서 제방이 무너지고 터져 토지가 피해를 입은 곳이 형언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해일은 근래에 없었던 일로서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무너지고 깔린 민가의 구제는 곡물과 달풀로 구별하여 주어서 안정을 되찾게 하고, 무너진 제방과 침몰된 소금가마는 물이 빠지는 대로 고쳐 쌓도록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하니, 정조가 전교하기를, “교동 수사의 장계로 인하여 금방 글을 만들어 하교하였는데, 부근 고을의 무너진 소금가마와 교동의 기본 조세는 감사와 의논하여 즉시 탕감하여 턱없이 세를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돌보아 구제하는 것도 또한 교동의 전례대로 하라.”하였다.
1807년 2월 17일 큰 바람이 불었다. 경기(京畿), 해서(海西), 호서(湖西) 3도의 바닷가 고을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통계해 보니 경기 교하(交河) 등 15읍진(邑鎭)의 물에 떠내려간 민가(民家)가 4백 20호, 익사한 사람이 10명, 침수된 전답이 7천 2백 79석(石) 영락(零落), 파손된 염분(鹽盆)이 3백 72좌(坐), 배가 29척, 어전(漁箭)이 19곳이었다. 호서는 평택(平澤) 등 19읍진의 물에 떠내려간 민가가 4천 6백 90호, 익사한 사람이 13명, 침수된 전답이 5천 7백 33석 영락, 파손된 염분이 68좌, 배가 43척, 어전이 36곳이었다. 해서는 김천(金川) 등 4읍의 침수된 전답이 68석 영락, 파손된 배가 6척, 어전이 5곳이었다. 곳곳에 터진 제언(堤堰)은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1808년 9월 19일 전라 감사 이조원(李肇源)이 이달 초2일에 영광군(靈光郡)에 해일(海溢)이 있었다고 아뢰었다.
1867년 9월 14일 전라 감사(全羅監司) 서상정(徐相鼎)이 ‘흥양(興陽) 등 여섯 읍(邑)에서 민가(民家) 1,086호(戶)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졌고 사람이 4명 압사(壓死)하였으며 논밭이 무너져 나가고 각곡(各穀)이 처참하게 못쓰게 되었습니다.’라고 치계(馳啓)하니, 고조 광무제가 전교하기를, “호남(湖南)의 연읍(沿邑)에서 풍재(風災)와 해일(海溢)이 일어났으니 이미 아주 놀랍고 걱정스러웠는데, 민가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것이 거의 몇천 호에 가깝고 압사당한 사람 또한 4명에 이르며 모든 들판이 모두 짠 물에 잠겨서 각곡이 흉년을 면치 못하게 되어 저 불쌍한 백성들이 몸을 붙이고 있을 데가 없이 울부짖고 있을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비단 이불과 좋은 음식도 다 편안치 않다.위유(慰諭)하는 거조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는 없지만 주전(廚傳)이 왕래하게 되면, 그저 민읍(民邑)에 폐단만 끼치게 될 것이니, 각 읍(邑)의 수령(守令)로 하여금 피해를 입은 곳에 급히 가서 높고 낮은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 교서(敎書)의 내용을 선포하고 낱낱이 만나서 위로하고 돌보아주게 하라. 원래의 휼전(恤典) 및 영읍(營邑)에서 돌보아주는 이외에 경사(京司)에 상납하는 돈 가운데서 알맞게 헤아려서 획급(劃給)하고 집을 짓고 시체를 묻어주는 등의 절차를 이리저리 상의한 다음 특별히 구휼하여 주도록 하라.대체로 안정시키는 대책은 제 자식을 보호하는 것처럼 하는 뜻을 체현하여야 하는 것인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황급한 정상에서 응당 피차가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비록 50호가 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도 일체로 거행(擧行)하게 하라고 묘당(廟堂)에서 행회(行會)하라.”하였다.
1899년 2월 23일 고조 광무제가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흉한 역적 무리들이 구장(舊章)을 혼란시킨 후부터 상하가 막혀 백성들의 형편이 보고되지 않는다. 대체로 사방에서 물난리가 나고 가뭄이 든 데 대한 보고는 일체 폐지되어 매번 궁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밤낮으로 걱정이 된다. 그런데 요즘 듣자하니 남쪽의 세 도(道)에서 해일(海溢)이 일어난 재변은 육지가 바다로 변해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 논밭들이 떨어져 나가고 인명(人命)이 엄몰(淹沒)하였으니 극도로 놀랍고 참혹한 정상에 대해서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도다. 이에 대하여 어찌 심상하게 구휼(救恤)하는 은전만을 베풀겠는가?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위유사(慰諭使)로 분차(分差)하여 재해를 당한 연해의 각 고을에 달려가서 이 조칙(詔勅)을 가지고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각 도에서 탁지부(度支部)에 바치는 돈 가운데서 1만 원(元)을 가져다 쓰도록 하되 그 폐해의 정도를 고려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각 도에 분배하여 파괴된 집을 짓고 무너진 둑을 쌓는 밑천으로 삼을 것이며,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역(身役) 대신에 무는 베와 군포를 다 탕감시켜 주어 가슴아파하는 짐의 마음을 위로하라. 오늘부터 무릇 재변에 관계되는 문제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것은 각 도에서 보고하는 대로 나에게 일일이 보고하되 내부(內部)에 분부하여 정식을 만들도록 하라.”하였다.
3월 9일 내부 대신서리 협판(內部 大臣 署理 協辦) 민병한(閔丙漢)이 아뢰기를, “방금 충청남도 관찰사(忠淸南道 觀察使) 정주영(鄭周永)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관할 지역인 한산(韓山)과 서천(舒川) 등 고을에서 음력 무술년(1868) 12월 2일에 동남풍이 크게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모래가 날렸으며 바닷물이 넘쳐 물에 빠져죽은 사람이 2명이고 연해(沿海) 여러 마을의 우묵하게 낮은 곳들은 전부 빗자루로 쓸어놓은 듯이 반반하고 조금 높은 곳은 그저 기둥과 들보만 남았습니다. 짠물을 먹은 전답은 400여 석락(石落)이고 제언(堤堰)이 무너진 곳은 40여 군데입니다. 홍주군(洪州郡) 등 여섯 고을에서 오늘 또 보고가 왔으므로 아래에 열거하며 보고가 없는 각 고을은 추후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의 해일이 일어난 각 고을에 선유하고 구휼을 베푸는 일에 대하여 2월 24일에 이미 조칙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충청남도에서 일어난 해일의 재해는 역시 매우 참혹하니 정부에서 이재민 을 구휼하기 위하여 내리는 특전(特典) 휼전(恤典)이 있어야 하겠는데, 신의 부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삼가 폐하의 결재를 기다립니다.”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 주본(奏本)을 보니 더욱더 참혹하다. 전에 내린 조칙이 있으니 휼전(恤典)은 그대로 거행하라. 음력 섣달 2일에 있었던 재변을 오늘 비로소 보고하였으니 민정(民情)과 관계되는 보고를 너무도 늦게 하였다. 재변 보고를 늦게 한 도(道)의 도신(道臣:관찰사(觀察使))에게는 녹봉을 감봉하는 벌을 시행하라. 동시에 천재지변과 재난이 있을 때에 백성을 위무(慰撫)하기 위하여 파견하는 위유사(慰諭使)를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피해를 입은 연해의 각 고을에 달려가서 지난번에 한 조칙을 가지고 선유하는 일을 급히 신칙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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