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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문화재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봉심(奉審)

등록일: 2013-01-09 09:38:23 , 등록자: 김민수

황실문화재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봉심(奉審)


http://blog.naver.com/msk7613


봉심(奉審)은 한성(漢城)과 경기(京畿)의 태묘(太廟),능침(陵寢),단(壇),전(殿),문묘(文廟) 및 지방의 사고(史庫), 태실(胎室) 등의 이상(異常) 유무(有無)를 살피고 점검하는 것이다.1463년 3월 4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옛 순흥(順興)의 소헌왕후 태실(昭憲王后 胎室)과 옛 은풍(殷豐)의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 胎室)은 석난간(石欄干)과 전석(磚石)이 조금 물러났으니, 청컨대 풍수학관(風水學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수즙(修葺)하게 하소서.”하니, 세조가 전교하기를, “어찌 반드시 따로 보내야 하겠느냐? 마땅히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극배(李克培)로 하여금 봉심(奉審)하여서 아뢰게 하라.”하였다.1681년 10월 24일 예조 판서(禮曹 判書) 여성제(呂聖齊)가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이민서(李敏叙) 등과 문묘(文廟)의 유현(儒賢)의 위패를 봉안한 무우(廡宇)를 첨가하여 만들 곳을 봉심(奉審)하였다.

1811년 2월 27일 개성 유수 남공철(南公轍)이 목청전(穆淸殿)과 경덕궁(敬德宮)을 봉심(奉審)하고 아무 탈이 없다는 것으로 아뢰니 순조가 하교하기를 “고려국의 각전(各殿)이며 능묘(陵墓)는 얼마나 지중한 것인가? 역시 이들도 군왕이셨다. 어찌 감히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아룀으로 인해서 열성(列聖)의 뜻을 추모하고 본받아 목청전과 경덕궁의 두 전을 받드는 남은 재력을 별도로 보류시켜 고려국의 전과 능묘를 수칙(修飭)하여 대양(對揚)하게 하고, 우리 조정의 개기 궁실(開基宮室)과 고려국의 개기 궁실, 그리고 고려와 우리 조정의 성우(城宇)와 흙, 돌 따위로 쌓아 올린 담인 장원(墻垣) 가운데 그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에 없는 것은 유수(留守)가 모두 자세히 기록해서 치문(馳聞)하도록 하라.”하였다.1802년 8월 12일 규장각(奎章閣)의 대봉심(大奉審)을 행하여 선조(先朝) 어진(御眞)의 대본(大本) 둘과 소본(小本) 하나의 표제(標題)를 썼다.

1867년 6월 3일 고조 광무제는 “고려(高麗) 왕릉(王陵)에 3년에 한 차례씩 예조(禮曹)의 낭청(郎廳)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는 것은 바로 법전에 정해져 실려 있다. 그런데 요즘 듣건대 능역(陵域)이 황폐화되고 의물(儀物)이 허물어진 것은 곳곳마다 모두 그렇다고 하니 수호하도록 한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다. 현재 보수하고 있는 일들을 천천히 하도록 내맡길 수 없으니 필요한 물력(物力)을 탁지부(度支部)에서 수송해 주고 이어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길일(吉日)을 잡아서 공사를 시작하고 전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도록 하되, 이후로는 땔나무를 하거나 소를 먹이는 것을 막고 봉축(封築)하는 방도에 있어서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말고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1871년 2월 10일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적전(耤田)을 친경(親耕)하였다. 1875년 8월 6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강원 감사(江原 監司) 윤병정(尹秉鼎)의 장계(狀啓)로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의 사고(史庫)에서 생긴 변고에 대하여 의정부인 묘당(廟堂)에서 조정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처리하는 품처(稟處)하라는 유지가 있었습니다. 금궤 석실(金櫃 石室)에 보관한 것이면 얼마나 엄한 비밀이기에 이렇듯 전에 없던 변이 있단 말입니까? 경고하는 말로써만 그칠 수 없습니다. 봉심(奉審)하여 고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종친부(宗親府)와 춘추관(春秋館)에서 시급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하였다.1878년 9월 27일 입직 승지(入直 承旨)는 냉천정(冷泉亭)에 달려가서 육상궁을 봉심(奉審)하고 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嬉宮)도 다같이 봉심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1900년 11월 2일 냉천정(冷泉亭)에 원임 직제학(原任 直提學) 김석진(金奭鎭)을 보내서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901년 1월 20일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뒤에 모사(摹寫)한 영정(影幀) 초본을 봉심(奉審)하겠다. 황태자가 배참(陪參)하는 절차를 전례대로 마련하며 시임 대신(時任 大臣)과 원임 대신(原任 大臣), 각신(閣臣)과 종친(宗親), 참정(參政)과 찬정(贊政),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대신과 의장(議長)은 들어와 보라고 명하였다.2월 5일 영희전(永禧殿) 어진(御眞)을 봉심한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원임 제학 민영환(閔泳煥), 직제학(直提學) 김성근(金聲根), 비서원 경(祕書院 卿) 이정로(李正魯)를 소견(召見)하였다.1902년 5월 4일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효전(景孝殿)을 전배(展拜)한 다음 기로소(耆老所)에 가서 영수각(靈壽閣)을 봉심(奉審)하고 기로소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어첩(御帖)을 직접 썼다. 황태자도 따라갔고 예식이 끝나자 상의사 제조(尙衣司 提調) 이지용(李址鎔)이 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几)와 지팡이인 궤장(几杖)을 바치자 황제가 직접 받았다.

1905년 6월 9일 예식원 장례 경(禮式院 掌禮 卿) 이용직(李容稙)이 아뢰기를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 觀察使) 이승우(李勝宇)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전주(全州)로 달려가 건지산(乾止山)의 조경단(肇慶壇)을 봉심(奉審)하니 도솔봉(兜率峯) 아래 주산 줄기의 왕(王)자 맥(脈)의 좌우에 무너져 내려 구덩이가 생긴 곳이 129개소나 되고 왕(王)자 맥이 시작된 봉우리의 등마루가 거의 평평해졌으므로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산은 토질이 무르고 암석이 전혀 없어 매번 장마를 겪을 때마다 걸핏하면 사태가 나서 점차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흙이 씻겨나간 허다한 구덩이를 하나하나 다 메울 수는 없겠지만 왕(王)자 맥은 가장 중요한 곳이므로 보강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체로 사태로 무너진 곳들의 깊이와 너비는 한자 가량 됩니다. 그림을 올려 보내니 예식원(禮式院)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더없이 중한 단이 있는 곳의 주산 줄기의 맥이 이처럼 크게 무너진 것은 매우 두려운 것이니 신의 원(園)의 당상(堂上官)이 급히 가서 봉심한 다음 보강할 문제를 다시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단이 있는 주산 줄기가 이렇게 무너진 것은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니 아뢴 대로 즉시 나아가 봉심한 다음 보강할 절차에 대하여 속히 품처하도록 하라.”하였다.10월 1일 사고(史庫)는 나라의 문헌을 금궤(金櫃)와 석실(石室)에 보관하는 곳이므로 중하기가 유별하다. 전에 없던 이번의 비와 바람에 무너지거나 젖지 않았겠는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으니 예식원(禮式院)과 비서감(祕書監)의 관원(官員)은 미리 각 사고(史庫)들을 봉심(奉審)하고 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1908년 1월 6일 고조 광무제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에게 명하여 유릉(裕陵)에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게 하였으며 이어 능 위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게 하였다.1909년 1월 13일 효창원(孝昌園)과 의녕원(懿寧園)에 예관(禮官)을 보내고 영회원(永懷園)에 지방 관리를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고 명빈(䄙嬪)의 묘와 연령군(延齡君)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1월 27일 경기 관찰사를 보내어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시종을 보내어 경릉(景陵)·창릉(昌陵)·공릉(恭陵)·순릉(順陵)·희릉(禧陵)·효릉(孝陵)·장릉(長陵)·명릉(明陵)·익릉(翼陵)·홍릉(弘陵)·영릉(永陵)·예릉(睿陵)·순창원(順昌園)·소경원(昭慶園)을 봉심하게 하며 파주 군수(坡州 郡守)를 보내어 흥원(興園)을 봉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월 29일 위화도(威化島)에 행차를 세우고 옛 터에 지방관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명하였다. 황태자 전하가 “행차가 의주(義州)에 머무르니 옛날 선조(宣祖)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큰 업적이 생각난다. 그러니 흠모하는 마음을 어떻게 금할 수 있겠는가? 취승당(聚勝堂)은 선조의 행재소(行在所)로서 그 뒤에 영묘(英廟)가 편액을 써서 달아 주었다. 규장각 경(奎章閣 卿)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오게 하라. 선조의 후손과 임진년(1592)에 선조를 호위하고 간 여러 사람들의 후손으로서 이번 이 일행 가운데 들어있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살면서 선조를 호위한 여러 신하들의 후손들과 함께 취승당에 모이게 하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사온서(司醞署)에서 빚은 술인 선온(宣醞)을 내려 감사의 뜻을 표시하도록 하라.”하였다.

1월 31일 어가(御駕)가 정주(定州)를 출발해서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임시 처소에 묵었다. 황태자 전하가 지방관에게 동명왕릉(東明王陵)에 가서 봉심(奉審)하고 올 것을 명하였다.2월 3일 장례원 경(掌禮院卿) 성기운(成岐運)에게 목청전(穆淸殿)을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명하였다.1916년 11월 6일 이재극(李載克)에게 선원전(璿源殿)을 봉심할 것을 명하였다.1918년 6월 13일 고조 광무제 폐하가 찬시(贊侍) 조지호(趙志鎬)에게 수릉(綏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감제(監祭)할 것을 명하였다.1919년 1월 26일 총호원(總護員)에서 ‘관의 은못 위에 덧칠하는 일을 이 달 27일에 시작하며 10번을 하루 걸러 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금번에는 매일하라. 그리고 산릉주감 제조 민영달(閔泳達)이 상지원(相地員) 등을 데리고 금곡(金谷)에 달려가 산을 봉심하고 별단(別單)으로 서입(書入)토록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금곡을 다시 봉심한 후에 그대로 능침(陵寢) 자리를 미리 정하여 흙을 모아 봉분(封墳)을 하고 푯말을 세우는 봉표(封標)하라.”하였다.

1920년 4월 7일 2대 순종 융희제는 홍릉(洪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전사(典祀) 한상학(韓相鶴)에게 건원릉(建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을, 이성묵(李聖默)은 의릉(懿陵)에 나가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명하였다.6월 9일 전사(典祀) 정만조(鄭萬朝)에게 태묘(太廟)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명하였다.9월 26일 찬시(贊侍) 김관호(金觀鎬)에게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고 오라고 명하였다.9월 30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홍릉(洪陵) 기신제(忌辰祭)의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이어 찬시(贊侍) 김관호(金觀鎬)에 명하여 홍릉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감제(監祭)한 뒤 이어 건원릉(建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라고 하였다.1923년 6월 15일 전사(典祀) 정만조(鄭萬朝)에게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올 것을 명하였다.1926년 2월 1일 찬시(贊侍) 현백운(玄百運)으로 하여금 홍릉(洪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게 하고 이어 제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3월 19일 서향각(書香閣)에 모셨던 어진(御眞)을 낙선재(樂善齋)에 이봉(移奉)하였는데 찬시(贊侍) 한창수(韓昌洙)에게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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