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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전 9월 백두산 벌써 첫눈이! 아래는 꽃단풍화려!
자전거 눈높이로 백두산길 자작나무 원시림 천지 절경 가슴에 담아
등록일: 2014-11-21 , 작성자: 광진의소리
>주말 갤러리<두달전 9월 22일 백두산 벌써 첫눈이! 아래는 꽃단풍화려!
-자전거 눈높이로 백두산 원시림 천지 절경 가슴에 담아(테마기행문1)
글/사진 편집국장 유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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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22일 천하제일 한민족의 영봉 백두산 천지 가는길
*중국 쑹쟝허진 여관-
쑹쟝허진 버스터미널 근처 허름한 여관에서 나홀로 자전거여행 나그네 짐을 풀었다. 장백현에서 넘어왔다. 숙박계부터 써야한다. 특히 탈북자들이 많다는 조중국경 변방의 중국인지라 한국인에 대해서 민감하다.
“워쓰 한궈런! 지싱쳐 유커!“
나는 한국인이다, 자전거여행중이라 하며 전단지를 보여주고 힘차게 설명을 해주었다.
“한궈런? 지신쳐 유커?“
남자 주인은 얼굴에 놀래는 표정이다. 그러나 왠 한국인이냐며 함박웃음꽃을 터트리며 “환닌! 환닌!“(환영한다)를 외친다.
자전거짐부터 살피고 출입구 안으로 덥썩 들어올린다. 안으로 들어서자 숙박계부터 써야 한단다.
“후자오(여권)?“
여권부터 내놓으라 했다.
그런데 여권이 손님접수실 컴퓨터 앞의 꼬맹이에게 건네졌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30대 중반 남자 주인은 9살박이 아들녀석이 지네 엄마한테 배워서 영어를 할 줄 알고 컴퓨터를 잘 한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사실은 자신은 완전 컴맹이라 외국인 손님에 대한 숙박계기록 인터넷시스템 체크를 꼬마아들녀석과 아내에게 의존한다 했다.
이런 경험은 허름한 여인숙 (하루 숙박료 중국돈 30원-한국돈 4,800원)이나, 여관(60원에서 100원-한국돈 9,900~ 16,500원)에서 몇 차례 겪었다. 호텔급은 보통 중국돈 200원(한국돈 33,000원)이다. 뒷골목 싸구려 여인숙에 화려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올리가 없다. 대부분 단체여행이라 여행사에서 다 처리해주고 가이드가 있고 화려한 호텔생활이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북한 혜산시가 바라보이는 장백현 시내에서도 변두리 여인숙 문을 두드렸는데 50대 중후반 남자 주인이 자기 여인숙엔 한국인 관광객은 처음이라며 후자오체크(여권인터넷체크 숙박기록)기가 없어 미안하다며 숙박을 거절한 적도 있다.(인터넷은 되는데 주인이 컴맹인듯)
강건너 북한땅이 보이는 어느 산중 한 깡촌마을(여관급 또는 호텔급 숙박시설 없음)에서도 한 여인숙은 숙박계기록 인터넷체크기가 없고 옛날 우리나라 60년대,70년대식의 수기숙박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인 할배가 보여주는데 하루전날 장삿꾼들이 10여명 다녀갔다.
다른 여인숙(이 마을- 전부 여인숙이 3곳이었음)으로 갔는데 마침 여주인이 밖에 있어 핸드폰으로 연결됐는데 한바탕 여행취지를 설명하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래서 시아버지 할배의 안내로 숙박계 안쓰고 뭉겠다. 말이 여인숙이지 난민수용소같았다. 문짝은 낡아 안에서 문을 잠궈도 불안했다. 흑백TV는 아예 먹통이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공용화장실이며 공용 세면실...물은 쫄쫄쫄 ....
그런데 이곳 여인숙도 밤새 7~8팀이 숙박했다. 20대 ~ 4,50대 등 대부분 장삿꾼들이었다. 말투가 억세고 거칠었다.중국사회가 밑바닥에서 맹렬한 불꽃으로 자본주의 장마당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 결국 북한사회도 장마당을 상대로 하는 장삿꾼들이 북한 세상을 바꾼다.
중국과 북한 국경변방도시는 탈북자들때문에 외국인 특히 한국인과 북한사람들에 대해 민감한 듯 했다.
‘나홀로 여행자‘인 나는 이번 중국투어 내내 저녁이면 숙박계 체크에 짜증이 나곤 했다. 린쟝시 전 13도구 작은 마을에서도 소동이 일어났다. 온갖 잡동사니 짐을 실은 자전거에다 밀집모자,시꺼먼 수염 등 몰골과 행색이 하두 수상해서인지 여관주인(다행히 한국말 소통이 되는 조선족)이 먼저 동네 파출소(공안)에 가서 숙박가능확인서부터 도장을 받아와야 한다며 파출소로 데려갔다.
이는 앞서 길거너 약 500m 거리의 한족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숙박료 중국돈 200원(한국돈 33,000원) 달라는데 깎아달라며 마침 한국말 유창한 조선족 사업가까지 동원해 사정을 해서 중국돈 160원에 낙찰했는데 파출소(공안)에 가서 외국인숙박허가서를 떼어오라해 옥신각신 끝에 포기하고 조선족 여관에서 숙박한 것임(여관급 숙박료 기본 100원인데 협상끝에 중국돈 80원 낙찰.시설은 대단히 청결하고 한글인테넷 가능하고 한국여행가서 배워왔다며 냉장고에도 각종 음료와 과자류 등을 유료로 비치해놓았다 )
20대 젊은 경찰관은 당직인지 썰렁한 2층 전산실에서 “안녕하세요? 나도 조선말 조금 해요. 반갑습니다“하며 반색을 했다. 여권과 전단지를 건네주고 여행의 목적과 앞으로 목적지 등을 충분히 설명했다. 경찰관은 전화로 어디엔가 뭐라뭐라 큰 목소리로 보고도 했다.
외국인 여행객 체크기에서 최종 ‘이상 무‘가 확인되자 경찰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반갑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이곳은 바로 강건너면 조선(북한)이라 그런다 했다.
그런데 밤중에 또 소동이 일어났다. 그 경찰관이 밤 11시경 여관에 나타났다. 여관에 제대로 박혀있는지 다시 확인하러 나온 것이다. 임검이었다.
여관주인한테 항의를 하자 경찰관이 나가면서 “저 사람 밤에 북한으로 넘어갈 수 도 있으니 경계하라“고 귓뜸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 홍보 전단지에 평양의 대동강도 자전거여행순례의 목적지로 표기된 것이 생각났다. 물론 실선이 아닌 ‘점선표기‘였지만 그게 오해를 산 것 같았다. 하하하하....그럴수도 있겠구나!
다음날 날이 새며 자전거짐을 챙기며 일찍 출발하려는데 남자주인이 이른 새벽 시내에 갔다 오는 길이라 하고, 밤에 (파출소때문에)고생했다며 극구 사양하는 나의 팔소매를 끌어당기며 부인과 아들,며느리,손자들이 함께 하는 가족식사 자리에 들이밀었다.
“먼길 떠나는데 아침밥은 먹고가야 하지않느냐“했다.
부인은 조선족이 아니고 한족이라서 우리민족의 정서를 잘 모른다며 조국의 손님인데 어떻게 아침밥을 굶겨서 보내느냐며 야단쳤다면서 귀속말이다. 가슴이 찡했다. 중국 천지에 널려있는 조선족들이 생존을 위해 겉은 중국인(국적)이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하는지 그 내면의 일면을 보는 듯했다.
린쟝시에서도 난리가 난적이 있다. 아주 허름한 30원짜리 여인숙 신세를 졌는데 40대 중반의 보름달같은 훤한 얼굴의 주인아주머니가 나에 대해 신기하다는 듯 엄청 호감을 표시했다. 한족인데 한국인 관광객이 자기 여인숙에 처음이고,더군다나 자전거여행가인데 시인이고 소설가라니 주변 가족들과 바로 옆 슈퍼에서 일하는 며느리에게까지 벌써 선전을 다 해놓았다. 식구들이 운영하는 같은 가겐줄 모르고 생수를 사러갔더니 며느리가 “니, 한궈런?“하며 반색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린쟝시를 벗어나 다음목적지로 향해 30km쯤 허덕허덕 자전거를 몰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빵빵소리가 나며 추럭 1대가 앞을 막아섰다.
그 여인숙 주인아줌마가 추럭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여동생과 운전자 50대 남자가 같이 내렸다. 깜짝 놀랬다.
숙박기록이 잘못되어 난리가 났단다. 후자오(여권)를 다시 달란다. 남자가 핸드폰 전화로 여권의 기록을 아예 통째로 어딘가로 일일히 다 읽어주었다. 아마 경찰서인듯 했다.
나의 양해를 구하고 여권을 여기저기 사진을 촬영하고 그자리에서 전송도 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였는데 주인 아줌마는 얼굴이 사색이었다. 한국관광객 재워주고 중국돈 30원(한국돈 4,800원) 번 죄밖에 없는데 아침부터 왠 날벼락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뛰부치! 뛰부치!(미안하다)했다.
“됐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남자가 핸드폰 저쪽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 주인아줌마의 말로는 ‘여권의 중국방문기간 비자유효기간‘을 인터넷체크기에 잘 못 찍어서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했다. 말하자면 자기가 날자를 오타치는 바람에 내가 중국체류 유효기간이 지나서 현재 ‘불법체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밤새 무사했는데 아침에 공안에서 적발한 모양이었다. 뛰부치(미안하다)를 연발했다.
“우하하하하하하..부커치! 부커치!!(별말씀을요)
메이꽌시! 메이꽌시!(괜찮습니다!)“를 목청껏 질러댔다.
일행은 정중하게 나에게 인사를 하고 무사히 여행을 하라하고 다시 온 길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미국인 기자도 두만강에서 실수하여 국경경계선에서 헤메다가 북한군인에게 끌려가 엄청난 곤욕을 치렀잖은가.
쓩쟝허진 여관- 다시 숙박계 이야기-
“후자오(여권)?“
여권을 받아 카운터에 앉아서 찐 고구마를 먹고 있던 있는 꼬마 아들녀석에게 넘겼다. 꼬마녀석이 컴퓨터를 열고 싱글벙글하며 ‘외국인 숙박계‘를 채워나간다.
남편의 핸드폰 전화를 받은 후 부인이 왔다.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말투가 샹냥했다. 부인이 여권체크를 했다.
“니 하오?“(안녕하세요?)
한국인 자전거여행자인데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여행한다고 하자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신기하다는 말투였다.
샹냥한 웃음을 지으며 찐 고구마를 더 가져왔다. 밤 8시경이다. 백두산 관광객이 쑹쟝허진에 많이 오는데 자기 여관은 외져서인지 많이 안온다며 자전거여행자가 신기한 듯 정성으로 대했다.
여관은 30대 중반 젊은 부부의 생업이었다. 한국음식이 먹고 싶다하자 골목에 마침 한국요리점이 있다며 직접 골목길을 안내했다. 김치에 쌀밥,맥주 2병으로 배를 채웠다. 음식맛은 그래도 중국식이었다. 맛이 별로였다. 술로 찐한 향신료의 역겨움을 눌러버렸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밍티엔 티엔지?“
(내일 날씨가 어떨런지요?)
그러자 부인이 다시 인터넷으로 날씨를 검색하자 백두산엔 먹구름이 잔뜩 덮혀 나온다.
“백두산갈려고 하는데 내일 구름이 저렇게 많으면 서파를 포기하고 바로 북파쪽 이도백하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아뭏든 혀짧은 반토막 중국말로 설명을 하자 백두산은 원래 날씨가 그렇다면서 주인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른 새벽 6시경 일찍 일어나 어제 도로변 쓰레기통에 버렸던 텐트가 생각났다. 노숙할 여건이 안되는데 워낙 무거운 짐이었다.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위해 아예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매번 한 여정이 끝날때마다 매번 짐 점검이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하나씩 하나씩 버렸다. 심지어 명함과 전단지조차 엄청 무게로 다가오기도 했다.낯선 중국인 한족,조선족들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기 위해 명함과 전단지(삐라?)를 많이 준비했었다.
중국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 강변도시와 농촌,산골에 많이 살포된 한국관광객의 최초 전단지(삐라)와 관련 에피소드가 많다. 삐라를 받아본 사람들은 내용을 유심히 읽어본 후 거의 99%가 두 손으로 정중하게 삐라를 나에게 반납했다. 반납자세가 너무나도 정중하여 거절을 못할 정도였다. 다음 기회에 상세소개하겠다.
전날 밤에 도착하면서 텐트를 길거리 쓰레기통옆에 버렸는데...“아니야, 나중에 증거물로 보관해야해...“얼른 여관문을 제치고 밖으로 나왔다.
“와아아~~~“
나도 모르게 탄성의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백두산쪽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벌건 빛을 골목길에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야간 영화촬영장같았다. 태고의 원시적인 햇살을 보는 듯했다. 아차산에서 보기 드믄 원초적 태양의 붉은 햇살이 동편 골목길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어제 인터넷 일기예보에는 오늘 백두산이 비구름인데...
그렇지,백두산 날씨는 시시각각 변화무쌍이라 했지...
와아아~~~ 지금 바로 출발이다!
내일 이도백하에 가서 비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바로 여관 여주인에게 “밖에 햇살이 눈부시다“하고 즉시 출발하겠다 하자 여주인도 (밤샘을 해서)부시시한 얼굴에 다행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전거 짐도 챙겨주었다.
한국인 백두산 여행자들은 공통적으로 날씨에 노이로제라고 한다. 일생에 두 번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는 날 구름이나 비가 오면 낭패다.
장백현(혜산시 건너편)에서부터 온통 백두산 날씨에 신경이 곤두선다. 서울에서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쪽 남파코스가 자전거코스로서 백두산천지까지 길이 새로 열렸다고 해서 그것만 굳게 믿고 왔는데 장백현 현지 조선족들에게 물어보니 “폐쇄“라 했다.
한때 일시적으로 길을 열었는데 다시 공사중이라는 등 아뭏든 지금은 폐쇄되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해서 이곳 서파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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