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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일이>자양3동 상일봉사학교 거목 상록수 두 그루 탄생
정용성 교장이어 문종국 25년 야학교사 아산상 봉사상 수상! 문 교사 변방교장에서 일약 ~
등록일: 2014-12-23 , 작성자: 광진의소리
▲방학식을 거행하고 있는 상일봉사학교/광진의 소리
<상일봉사학교 방학식 르뽀 = 유윤석 기자>
- 상일봉사학교 정용성 교장과 강남교육지원청 문종국 교육장 들불 야학이야기-
가슴이 뽀개질려고 한다. 먹먹하다. 정용성 상일학교 교장(84) 선생의 숨은 이야기를 남몰래 엿들은 내가 잘못이다. 그냥 표면적인 앎,그 정도에서 적당히 알고 지내야 했다.
그의 얼굴에 이력서가 다 담겨있다. 만고풍상,비바람 눈보라헤치며 척박한 한국 사회교육계에 거목의 상록수로 우뚝 선 사회교육가다.
오늘,거기에 또 하나의 신기루같은 사랑이야기가 내 가슴을 멍들게 한다. 초등학교 교직생할하면서 25년간 일주일에 두번씩 무료교사로 봉사를 한 문종국 선생 이야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한결같은 늘 푸르름으로 25년간 야학의 한 모퉁이를 지켰다. 두 분 다 뼈가 아리는 눈물의 맹서가 있었다. 그 초발심은 중장년,황혼녘에 이를수록 더욱 더 깊고 굵고 웅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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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성 상일학교 교장 들불야학 이야기-
*정용성 상일학교 교장 들불야학 이야기-
“맏이인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했다. 8명의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비가 몹시 오던 어느 날, 부잣집 대문 앞에서 뺨을 맞고 돌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신문이 젖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나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사범대학을 나와 불쌍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창호지에 들깨 기름을 발라 그 속에 신문을 넣고 배달을 계속했다. 그리고 두어 달 대금은 절대 받지 않았다.
자존심은 회복됐고 열심히 노력해 훗날 수석으로 사범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꿈꾸는 다도리)
이게 인간 정용성의 빼어난 자존심의 그루터기다.
---------------------- | ◆척박한 토양 속 빈민학교운동 38년
거목 상록수 광진구에서 쓰러지나! 사회봉사학교 상일봉사학교 재정난으로 문닫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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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성 교장 부부-야학이 재정난으로 위기를 맞자 부인 김희옥 여사는 ‘학교를 살리겠다’며 화장품행상을 나섰다가 업친데 덥친격으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여 위독한 처지로 굴렀다.그러나 학교는 부인과 함께 다시 일어섰다.
80고령의 오뚜기 인생 작은 페스탈로치 정용성 교장 전직 교장 교육장 등 안락한 여생을 버리고 80고령까지 부인과 함께 빈민학교운동
그동안 교육계 일반사회 등 십시일반 후원금으로 운영
인생은 나그네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걸 평생 무소유 사회교육가 정용성 선생.오래만에 자양3동 상일학교 3층 교실에서 뵈었다.
“유 국장님,이제 저희 상일봉사학교 문을 닫아야 하나봅니다”
지난 연말 12월 초엽, 방학식을 하루 앞둔 자양3동 소재 평생사회교육시설인 ‘상일봉사학교’ 정용성 교장은 학교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생겼다며 만고풍상 노안(82세)에 깊은 수심이 서렸다. 작은 돈으로 지역사회에 밝은 등불을 밝혀왔는데 요즘 세태가 그 작은 등불마져 기름이 쇠잔해졌다 한다.
-.요즘 세태가 이웃사랑이 더 메말라가는 경향입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십시일반 독지가들의 정성으로 불우청소년과 만학의 어르신들을 위한 초등과정과 중등과정의 무료교육을 38년간 유지해왔는데 요즘은 정말 어려운 세상인가 봐요”
한국형 작은 거인 페스탈로치로 소문난 정용성 교장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오늘날 근대 교육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스탈로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몰입하면서 빈민학교운동에 투신,좌절과 재정난의 악순환속에서도 근대교육학의 길잡이가 되었다.
-. 광진구도 정말 어려운 형편입니다.
“최종적으로 저희 아내에게 저의 결심을 털어놓았어요. 이제 그만 좀 쉬자. 재정문제가 한계가 왔다고 했죠”
그런데 부인 김희옥 여사는 오히려 펄쩍 뛰다시피 하며 “그어려운 시절도 다 이겨왔는데 ...”하며 한사코 말리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했다고 한다. 부인은 한때 상일학교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발벗고 화장품행상에 나섰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상에서 상일학교의 위기를 눈물로 겪어야 했다. 물론 상일학교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다. | ◆비닐하우스 야학교실 허물고 짓기 구청과 20년간 모진 싸움
우리사회가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70년대 정 교장은 진학을 못하는 나이어린 학생들이 불량청소년이 되는 걸 현직 교육자의 양심으로 안 본척,못 본척 할 수가 없었다.
1975년 하일동 화재민촌에 하일야학중학교(상일복지학교 전신)를 열었다.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가마니를 깔고 첫 야학을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학생들은 와글와글 배로 늘어났다. 월급을 털어 부랴부랴 비닐하우스 1동을 더 세웠다.
그러나 구청에서는 그린벨트 지역이라는 이유로 2개월에 한 번꼴로 철거했다. 지었다 헐었다를 하며 모진 세월 20년간 구청과 씨름하며 배우겠다는 가난한 어린 학생들을 기여히 가르쳤다.
그는 사범대 수석졸업의 특전을 버리고 시골 고향 초등학교 교사로 투신한 이후 터 1998년 서울 성동교육장으로 정년퇴임 할 때까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상일봉사학교를 운영해 왔다. 물론 개교 이래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일체 받은 적이 없다. 하일동에서의 야학을 시작으로 38년 동안 5,000여명의 불우청소년 학생들을 인성교육과 함께 면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 ◆월급 털어 병아리 400마리 키워...
철거민동네 주민화합 운동회 열어 ------------
그에겐 에피소드도 많다. 상전벽해라 한다. 살기좋은 지금 상계동의 옛날은 그 유명한 철거민촌이었다. 1965년 서울의 상계초등학교로 부임했다. 당시 이곳은 철거민 자녀가 대부분이었다.
하루 하루 살기가 팍팍한 철거민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시비와 다툼으로 주민들간 갈등도 많았다. 정 교장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뽀쪽한 방법이 없나 머리를 싸맸다. 주민들의 갈등을 풀고 주민끼리의 대화합의 장으로 생각해낸 거이 ‘철거민촌 주민 대화합운동회’ 개최다. 그러나 정 교장은 운동회 행사비가 걱정이었다.
궁여지책으로 2년을 계획하고 월급을 털어 병아리 4백 마리를 사들여 2년동안 신바람으로 키웠다. 마을에선 ‘병아리 선생님’이란 별명이 붙어다녔다. 이 양계사업으로 당시 20만원의 이익금이 생겨 이 돈으로 운동회를 열어 온 주민이 화합하는 잔치를 벌였다. 정말 영화같은 한 장면이다.
또한 정 교장(늘상 부자동네 거부하고 가난한 지역 선택)은 1973년 부임한 지금의 상일초등학교(전 구천초등학교) 역시 대부분 철거민 자녀들이었다. 정 교장은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을 가져라“며 장학사업을 펼쳤다. 가난한 초등생들인 아이들에게 ”너희들도 중학생이 될 수 있다“며 용기를 갖게하고 장학금 마련을 위해서 회양목 30만 그루를 길러 ‘회양목 선생님’ 으로도 유명해졌다. 그러면서도 피곤한 몸을 마다않고 퇴근과 동시에 칼같이 야학교실로 달려가 야학 ‘올빼미 선생님’이란 별명도 생겼다.
이 과정에서 결혼 후 처음으로 어렵사리 마련한 집 한 채가 날아갔다. 이후 ‘무소유 사회교육가’ 정용성 교장은 ‘내 집이 없는 무주택자’다. 교장,강남교육청 학무국장,서울성동 교육청장 등 23년의 굵직한 발자취가 웅변하듯이 그는 모든 것을 ‘초발심’에 맡겼다. | ◆부잣집 신문배달 잘못하여 뺨맞고 ...
사범대 수석졸업 평생 ‘봉사교육가’로 ----------------
“맏이인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했다. 8명의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비가 몹시 오던 어느 날, 부잣집 대문 앞에서 뺨을 맞고 돌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신문이 젖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나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사범대학을 나와 불쌍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부터 창호지에 들깨 기름을 발라 그 속에 신문을 넣고 배달을 계속했다. 그리고 두어 달 대금은 절대 받지 않았다. 자존심은 회복됐고 열심히 노력해 훗날 수석으로 사범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꿈꾸는 다도리)
가슴이 뽀개질려고 한다. 먹먹하다. 정용성 상일학교 교장(84) 선생의 숨은 이야기를 ‘꿈꾸는 다도리’에서 남몰래 엿들은 기자가 잘못이다. 그냥 표면적인 앎,그 정도에서 적당히 알고 지내야 했다.
◆전직 화려한 교장,교육청장직 뒤로 하고...
그의 얼굴에 이력서가 다 담겨있다. 만고풍상,비바람 눈보라헤치며 척박한 한국 사회교육계에 거목의 상록수로 우뚝 선 사회교육가다. 그는 물질적 가치 보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성교육에 평생을 걸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불우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감동어린 인성교육을 하며, 장애자는 물론 배움에 목마른 주부,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참교육의 거목의 상록수 한 그루 그루터기가 되어온 한국형 페스탈로치다. 우리 한국교육사회에 영원한 사표(師表)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제1회 한국교육자 대상, 제3회 서울시민대상,제17회 아산상 봉사부문 대상 등 한국교육계의 권위와 영광을 웅변하는 굵직한 상들을 안았다.
◆다양한 사회참여 프로그램도 운영
정용성 교장은 페스탈로치 선생이 그랫듯이 단순한 빈민교육에서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지역사회 참여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했다. 당연히 비용이 늘었다. 상일봉사학교는 성인한글반, 대입검정고시반, 고입검정반 등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늦은 나이에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어르신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어머니교육반, 주민체육대회, 경로잔치 등 지역주민과 소통하며 함께 나눔의 행사도 가져왔다. 또 도서관운영, 유명인사 초청강연, 예식장운영, 컴퓨터교육반 운영 등 모든 과정을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해 일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지역 주민의 한을 풀어주고자 무료 예식장을 제공하고 주례는 정 교장이 선다. | ◆38년간 3무(無)학교운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
이 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입학식이 없고, 교사 월급이 없는 3무(無)학교로 정평이 나있다. 학교운영비는 서울시내 100여 학교와 광진구청, 시 교육청 및 각 기관, 개인 독지가 등의 후원금으로 마련된다. 교과 담당 교사들도 전·현직 교사, 대학교수, 재능기부교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훌륭한 수업을 진행 하고 있다.
특히 멀리 떨어져 직접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장애자들을 배려해 주요 수업내용을 인터넷 사이버로 전하고 있는데 30만~32만 명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모든 것이 무료이다 보니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오늘,이곳에 신기루같은 사랑이야기가 내 가슴을 멍들게 한다. 정용성 교장이 추천한 문종국 선생이 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을 기념하여 운영하는 사회 최고 권위의 ‘아산상 봉사상’을 수상했다.
문종국 선생도 가난한 농촌출신으로 겨우 중학교 졸업하고 무작정 친구찾아 상경하여 공장에 취직하며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계로 투신한다. 현직 교사를 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25년간 무려 1주일에 2회강의를 맡은 무료 야학교사 봉사가 인정되어 아산상 봉사상으로 수상했다.
주최측은 공적사실관계를 서울시 교육청에 의뢰했으나 2년도 아니고 25년은 절대 불가능하다며 ‘인증’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정용성 교장은 평생 야학하면서 매달 회보 소식지를 발행했다. 그 월간 회보에는 매달 봉사선생들의 얼굴과 간략한 프로필이 소개되었다. | ◆청출어람청어람인가 검정고시 출신 야학 교사 강남교육장으로!
문종국 야학 교사 아산상 수상 ---------
“여보시오. 내가 문종국 선생을 아산상을 받게해주려고, 이 많은 상일학교 월간 회보를 25년치를 위조했단말이요?”
정 교장은 공적증명에 난색을 표하던 서울시교육청에 상일학교 역사인 월간 회보를 쏟아냈다. 물론 서울시 교육청은 발칵 뒤짚혔다. 서울시교육청은 문종국 선생의 ‘25년 야학교사 봉사’를 인증했다.
당연히 문 선생은 교장 정용성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이 학교에서 ‘영광의 아산산 봉사상’을 수상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수상이 확정되고 나서 서울시 교육청은 문종국 선생을 강남교육지원청 교육장으로 발령을 냈다. 시골 중졸학력에 검정고시출신이며 갓 교장직에 오른 ‘촌뜨기’를 일약 ‘강남의 교육 수장’으로 특급인사를 한 것이다.
참으로 살아있는 감동드라마다. 한국사회가 갈수록 각박하고 황금만능주의가 교육계마져 황폐하시키고 있지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늘푸르른 상록수가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척박한 토양을 먹으며 모진 인성(人性= 휴머니즘)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는, 그래서 희망의 나라 한국땅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내내 훈훈해진다. | ◆헌시~
상일봉사학교 개교기념 축하 시(詩)다. 34년간 모진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온 “불우청소년과 만학도들의 상록수 한 그루터기, 상일봉사학교”를 기리는 시낭송이 참석자들의 가슴을 훈훈한 감동의 생명력으로 져미게 했다.
“님은
달과 별을 안고
고요히 흐르는
깊은 강이어라.
마른땅을 적시며
생명을 가꾸어 온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이여
희생의 골목길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일하다
눈물로 지새우며
생일 한 번 못 가졌던 상일봉사학교
손마디 끝
용기를 심어주며
가슴을
부둥켜 안고
텃밭을 이루던
고귀한 정열이여
(중략)
-전주에서 한규준-
정용성 교장은 광주사범과 연대 교육대학원을 나와 서울시내에서 3개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강남교육청 학무국장,성동교육장,3기 서울시교육위원 ,한국교육자 대상을 수상 등 화려한 교육계 경력의 소유자다.
이러한 그가 일신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하고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인 들불 봉사학교, 배움의 길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한 맺힌 불우한 청소년들과 만학의 어른들을 위해 수업료가 없고 입학시기기 없어 언제든 입학이 자유로운 학교,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철저한 인성교육을 철학“으로 하는 휼륭한 교사들을 초빙하여 월급도 없이 무료 봉사하게 만든 3무학교를 35년간 이끌어온 거목 상록수 한 그루다.
상일봉사학교는 1975년 정 교장이 강동구 하일동 화재민촌 영세철거민 자녀,중학교 진학을 못해 방황하는 불우청소년들을 발견하면서 비닐하우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린벨트내 무허가라는 이유로 한 해에 6번이나 철거신세를 겪어야 했고, 어려운 학교재정을 위해 화장품 외판행상을 나선 부인 김희옥 여사는 불의의 사고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수술대에 오르는 등 정 교장 내외분의 하늘같은 희생정신은 한규준 시인의 헌시에 깊게 그리고 짙은 ‘소외계틍에 대한 교육사랑’으로 가슴져며온다.
<상일봉사학교의 밝은 미래를...>
한규준 시인의 이어지는 축하 헌시와 함께 상일봉사학교의 밝은 미래를 그려본다.
명예와 욕망도
등골에 흐르는
땀방울처럼 벗어버리고
오직
한 올의 빛
가르치며 보살피는
한 줄기 사랑으로
살아온 강이어라.
이제는
흐르는 강줄기 따라
수양버들 단장하고
고기떼 수영질하며
버드나무 춤추는
새봄
가꾸어온 삼십사년 보람을
느끼며
잔잔한 미소로
보람으로 가득한
행복을 누리소서.
-전주에서 한규준-
(탐방취재 글/광진의 소리 편집국장 유윤석) | | 기사에 대한 한줄 의견을 남겨주십시요. 256 남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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