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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2023재정 ...
“서울 강·남북 발 ...



일본국평사 일제 강제징용유해봉환 참관기/유윤석 대변인
남과 북 당국의 깊은 관심속 방송신문 등 전 언론 뜨거운 취재...일본 언론은 일제히 침묵

등록일: 2018-03-03 , 작성자: 광진의소리

▲(사진 맨위)2017년 광복72주년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1차33위 고국봉환행사 남산노제 등
▲(사진 아래)일제강제징용유해국민봉환단 일행이 국평사 경내로 들어가고 있다.
국평사 법요식 모습 등/광진의소리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국민봉환단 본지 편집국장 유윤석 일본 국평사 취재기>
∙제99주년 3*1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국민봉환단 대변인

(유윤석 기자 르뽀)

■ 평창올림픽으로 엄청 강화된 김포공항 보안검색

2월 27일 새벽 4시 서울.광진구 자양동 노룬산시장앞에서 택시를 잡고 홍대역으로 휘몰았다.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국민봉환단의 단원(대변인 겸)으로 동참한 나는 홍대에서 김포공항행 직행지하철 노선을 이용하기위해 택시를 잡고 새벽길을 재촉했다.

<김포공항 6시 30분까지 도착할 것!> 실무단의 반복고지의 강박관념이 뇌리에 박혔다. 평창올림픽방해테러대비 출국수속이 대단히 번거롭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아뿔사 홍대역까지 총알택시로 쏜살같이 내달려왔는데 ‘깜박잊고 국평사 윤벽암 스님한테 전할 대형사진인화선물-작년 8*15광복절행사시 서울.남산에서 촬영한 노제사진 대형 사진인화지’를 집에 놓고 그냥 나온 것이다.

홍대역에 다와서 아내의 긴급전화가 터진 것이다.

다시 택시를 그대로 되돌려 노룬산시장입구까지 번갯불처럼 부산을 떨었다. 김포공항에 6시 30분까지 도착하라는 실무팀의 재촉때문에 강박의식에 괜히 마음만 허둥댔다.

이번엔 공덕전철역에서 하차하여 겨우 김포공항행 지하철을 타고 약정시간인 6시 30분 정각에 공항로비에 도착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국장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북새통이었다.

일본 하네다공항행 아시아나항공기 역시 만석이었다. 한국어와 일본어,영어의 기내방송이 주 고객이 한국인,일본인임을 암시했다. 실제는 대부분 약 60~70%가 한국말소리의 승객으로 보였다. 한일간의 인적교류의 비중이 얼마인지 와닿았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이날 출입국보안검사가 무척 까다로웠다. 심지어 신발도 모두 벗도록 했다. 여행자들의 잔잔한 불만이 꼬리를 잇자 평창올림픽 때문에 테러위혐을 대비해 평소에 비해 보안검색이 엄청 강화되었다는 검색요원들의 설명이 잇달았다.

우리 유해봉환단은 이수호 단장 등 총 23명이었다.윤승길 사무총장은 출발전 공항로비에서 나에게 유해봉환단 대변인으로 결정했다고 전갈했다.

■ 8시 40분 김포공항 출발 2시간 25분만에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 도착

일본은 정말 가까운 이웃나라다. 비행기로 불과 2시간 25분 거리다.

기내 의자 앞 모니터 계기판은 비행고도 11582m,비행속도 663km/h,비행기 밖 상공온도는 -67°C 를 기록했다. 동해상공 및 일본내륙 상공의 무시무시한 한기를 보여주어 놀랍기도 했다. 기내는 온화한 평상온도를 유지했다.

특히 일본내륙상공을 통과할때 일본 내륙 산간지방은 흰눈이 하얗게 덮혀 있었다. 1만 1천여km 상공에서 바라보는 설경은 전설속의 신시(神市)같기도 했다.

하네다 공항엔 하루 전날 미리와 대기하고 있던 이정희 사무국장과 일본측 홍00국장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환영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1시간 30분거리인 국평사 절로 향했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되어 대로변 길가에 대형버스를 세운채 국평사측에서 제공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일본 도시락은 처음이다. 한국도시락과 맛에 있어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김치류가 없어 한국형 도시락맛을 느낄수는 없었다.

점심해결후 다시 차량은 국평사로 향했다.

처음본 일본 도쿄 도시풍경은 서울과 거의 유사하여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식별이 되지 않을정도로‘ 너무나도 유사했다. 한문세대인 나는 도쿄시내 간판과 교통표지 등 한자표현의 안내판도 많아 낯익어 이질감이 없어서 편했다. 그러나 이국에 욌다는 설레임과 흥분감이 없어 아쉽기도 했다. 다만 일본 도쿄중심부는 엄청난 교통체증이 장난이 아니어 이 점도 서울과 유사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도심중싱가나 변두리 대로변이든 주택가 이면도로든 불법주차 차량이 거의 한대도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일부러 밤에도 숙소인 호텔주변(하네다공항근처) 대로변,주택가 이면도로 등을 살펴봤지만 크든 작든 도로변과, 주택가 이변도로에도 불법주차한 차량이 거의 한대도 보이지 않아 경악했다.

한편,하네다공항 중심부를 관통하며 변두리 외곽을 달리면서 차창에 비친 도시건축물 구조와 배치는 ‘그렇게도 겸손하고 검소한 모습‘일 수가 없었다.

도시 전체의 건축물 구조가 위화감을 주지않는 편안하고 겸손하고 질박한 검소함마져 느끼게 했다. 서울의 요란한 건축물군락과는 비교되었다. 일본 정부와 일본국민의 ‘실사구시 국민철학’의 반영인듯했다.

■국평사 윤벽암 스님 등 일본측 인사들 우리 봉환단에 뜨거운 격정의 감사표현

국평사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윤벽암 주지스님 등 국평사측 신도들과 일본인 불교계,일제강제징용 군인.군속명부 출판사 등 유관인사 등 100여명이 우리 유해봉환단을 뜨겁게 환영하며 법요식에 동참했다.

국평사 절의 외형은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도쿄 변두리 주택가에 일반 주택건물처럼 위화감이 없고 고즈녁하게 낮은자세로 자리했다. 건축양식도 한국형 일반빌라형 주택양식으로 사찰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경내에 들어서자 사찰 정면에서 거대한 기품이 엿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가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 봉환단일행을 맞으며 이곳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특히 남과 북,일본 근,현대사의 쓰라린 역사의 아픔이 잠긴 국평사(총련계)의 남다른 애국혼이 고독함에 짓눌리면서 긴긴 세월을 눈물로 지세워온 투혼이 육감으로 엄습해오는 듯했다.

마침 이날 처음방문한 이수호 단장 역시 의외의 소회를 밝혔다.

“이는 한국과 북한,일본 모두가 피해자일수도 있다.그래서 함께 풀어야 한다“했다. 놀라운 관찰이다.

일제식민강탈의 역사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해방이후에도 일본과 남과 북의 분단고국으로부터 차가운 시선들을 견디며 살아야했던, 처연한 우리의 근,현대역사를 보듬고 살아온 눈물겨운 투혼의 거대한 웅혼을 느꼈다.

경내에 들어서자 우리 옛말에 “반가운 손님을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한다‘는 말이 실감날정도로 윤벽암 스님이 커다란 얼굴에 대형 함박웃음꽃을 가득 피우며 봉환단의 손을 일일이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인사하며 맞아주었다.

이수호 단장에 대해 소개를 받고는 ‘무릎을 꿇고 고마움의 말씀을 표하며 어느새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역사 압제의 굴레에서 이제 분단민족의 쓰라린 상처까지 보듬고 살아야하는 윤벽암 스님, 아직도 남과 북,일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가운데 일본 전역에 흩어져 내버려진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를 선대에 이어 얼마나 어렵게 ,외롭게 지켜왔는지,언젠가는 반드시 고국의 품으로 보내드리겠다고 맹서를 얼마나 했던가?

그런데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 아닌가? 작년 8*15광복절때 1차 33위에 이어 이번에 다시 약속한대로 2차로 33위 유해를 고국땅으로 보내게 되었으니 윤벽암 스님은 그야말로 감격과 격정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릴 듯 했다. 절제된 감격이 온 몸에서 배어나오는 듯했다.

또한 윤벽암 스님은 워낙 유창한 고국언어 구사에 법당에서 경내에서 버스에서 식당에서 ....
목소리 또한 쩌렁쩌렁하여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

도대체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어,모국어가 유창했다. 고마운 일이다.



■사찰 지하엔 아직도 고국행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고 있는 유해들 보존돼있어 안타까운 가슴 쓸어안아

윤벽암 스님은 공식 봉환법요식을 하기전에 먼저 법당 지하의 여러 구조물을 소개했다. 마치 동산의 야외 추모공원처럼 지하공간엔 묘비도 있고 여러 형태의 유해안치형상물이 일본특유의 장례문화에 맞게 정갈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아직 고국행 티켓차례가 안되어 대기하고 있는 일제강제징용희생자들의 유골함들도 방 한 켠에 정성스럽게 모셔져 있었다.

“우리도 빨리 고국으로 보내주셔요! 정말 너무합니다! 우린 언제 가나요?”하며 유해들이 산자로 변신하여 절규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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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봉환추모법요식 엄숙하고 경건하게 거행

한편, 이날 봉환단은 윤벽암주지로부터 국평사의 구구절절 감동어린 역사의 소개와 법당과 법당지하의 여러 유해관련 일본식 불교안치 등 시설을 소개받은후 다시 법당밖으로 나와 불교의 전통의식으로 ‘사찰돌기’(일명 ‘탑돌이’와 유사)를 하였다.

한국측 봉환단일행과 일본측 신도 및 유해사업관련 일본인 유관인사들 수십여명이 긴 행렬을 이루며 경천사 대경스님과 국평사 윤벽암스님,이수호 유해봉환단장이 앞선 가운데 20여분에 걸쳐 사찰전체를 돌며 참례를 표했다.

다시 법당에 돌아온 오후 3시 30분, 공식행사로 ‘일제강제련행 조선인희생자 유골봉안추모 법요식’(일본식 표현)을 거행했다.

이날 국평사 대표역원 이상민선생의 사회로 주지스님과 유해 33구 입장이 시작되고 이어 개회를 선언했다.

윤 주지스님은 3배공양과 불공예를 집례하고 이어 유해봉환단 송예슬 경천춤꾼의 법당을 정중동의 처연하게 뒤흔드는 고요한 몸짓의 헌무가 참례자들의 가슴을 탄식과 기쁨의 환희의 물결로 적셨다.

이어 일제강점기 일본 장생탄광수몰사고로 인한 일제강제징용자들의 유해발굴 및 고향반환사업을 피눈물나게 전개하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이노우에 요꼬 선생(井上洋子.여성.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수몰사태-을 역사에 새기는 회 공동대표)의 인사말씀과 조세이탄광 수몰사고(長生炭鑛水沒事故)은폐역사에 대응하여 벌인 22년간 투쟁활동육성보고가 장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이노우에 대표는 ‘(일제강점기)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 및 고향반환운동 등 인류보편적 양심운동을 펼치는 일본인 시민운동활동가로서 절박한 심정을 담아 발표하여 참례자들에게 숙연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발표문 전문 아래 게재)

“태평양전쟁중의 1942년 2월 3일에 일어난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장생탄광)’이라는 해저탄광(海底炭鑛)에서 대규모 수몰사고가 났습니다‘하고,

“사고로 숨진 183명의 희생자중 70%를 넘는 136명이 한국사람(조선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중 4명은 어린 10대였으며 20대도 73명이나 포함되어 결혼도 안한 애젊은 청춘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고 밝히고,

“전시중인 대형사고이면서 다음날의 야마구치 아사히신문은 ‘입갱자의 대부분이 구출되었다’고 허위보도를 날렸으며 그후 이 사고는 어둠속에 은폐되었습니다“하며 일본정부의 은폐역사의 진실규명에 혼신의 노력의 다했음을 토로했다.

이들은 한일간우호친선을 위한 민간단체로 희생자명부 만들기,신원조회사업 등은 물론 매년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애도식을 갖는 등 일본인으로 어려운 인도적 정의의 사업을 선구자적으로 감당해내고 있다.

특히,이들은 조세이 탄광에 매몰된 조선반도출신 민간징용자의 유골을 수집.조사하고 일본국과 한국유족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전하는 등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따라 정의로운 인도주의적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어 재일본조선청년동맹 니시도꾜 동부지부 이동석 위원장(북측 입장 표명한 듯)의 감사의 인사말과 오늘 유해봉환의 역사적인 의미를 새기는 축사가 있었고,뒤를 이어 일제강제징용희생자 제2차 33위 유해봉환단 이수호 단장(재단법인 전태일 이사장)의 격정어린 인사말이 있었다.

특히 이수호 단장은 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한국노동운동계의 원로인바, 이번 유해봉환사업에 동참함으로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수호 단장은 이날 한국측을 대표하는 인사말씀 모두발언에서 “오늘 처음 이곳 국평사 일제강제징용 한국인희생자 유해보관 현장을 여기저기 직접 두 눈으로 살펴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정말 오기를 잘했다.

이런 유해보관봉환사업을 펼쳐온 국평사측과 우리 종교계,민족단체,시민단체 등 한국봉사단측에 너무나 감동적이다. 여러분들의 노력에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연설내내 말끝을 잇지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일제식민강탈만행의 역사를 되새겨 참례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졌다.

이수호 단장은 “오늘 제2차유해봉환을 계기로 앞으로 남과 북이 함께하는 유해봉환사업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조국의 통일사업의 일환으로 남과 북,해외,일본이 함께 펼쳐나갈 것을 다짐한다고 하고, 알고보면 남과 북,일본당국도 희생자라며 이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권고하고 함께할 것” 다짐하였다.

이어 국평사의 민족수난의 역사를 민족사랑의 투혼으로 보듬고 온 윤벽암 국평사 주지스님의 보고말씀과 감격어린 감사의 인사말씀이 이어졌다.

윤벽암 주지는 특히 한국의 노동계를 대표하는 이수호 봉환위단장의 국평사방문과 제2차 유해봉환에 대해 거듭 사의를 표하고 지극정성으로 안내했다.

윤벽암 스님은 지난해 8.15광복절기념 제1차 33위 유해한국봉환차 처음 한국방문(윤벽암 스님은 총련계 인사임)을 한 후 이번 제2차 유해봉환역시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모든 일정을 뜨거운 눈물로 함께 하였다.

법요식은 내외빈 축사에 이어 ‘유해 환송의식’으로 한국측 봉환단위원인 유명옥 선생(사단법인 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장)의 ‘징용아리랑’열창으로 법당을 처절한 일제강제수탈역사의 현장을 재현하는 듯 했다.

유명옥 선생의 이어지는 광복군 아리랑,일제강점기하의 애국가아리랑 등이 처연한 목청으로 열창이 이어지면서 객석의 참례자들은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고 일부 참례자는 참았던 눈가에서 격정의 눈울음이 터지기도 하였다.

아리랑민족의 수난시절 눈물과 탄식,저항,죽음 그러나 그 수많은 역경의 아리랑고개를 넘어 다시 힘차게 역경을 헤치고 딛고 일어서는 승리와 새로운 만남의 환희의 아리랑으로 전변되면서 법당은 70여년 만에 그리운 고국의 품으로 환국하는 33위 님들에 대한 뜨거운 열기로 축복의 이별사를 함께 했다.

한편,일본인들로 구성된 조세이탄광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일본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조선인 희생자 유골발굴∙수집∙고향반환운동단체‘. 이하 ’새기는 회‘라 함) 이노우에 요꼬 공동대표의 강제징용희생자유해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의 사과와 반성의 말씀 등 절박한 목소리의 총체적인 활동보고의 조사말씀(弔辭)이 있었다.

이노우애 대표는 인삿말에서 “오늘 이러한 역사적인 법회의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조세이탄광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 長生炭鑛의 水非常(한국식 표현은 ’장생탄광수몰희생‘)을 歷史에 새기는 회’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하고,

“강제연행,강제노동 끝에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은 유골앞에서 위로의 말을 찾을 길이 없고,오직 삼가 명복을 기원드리는 것과 한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했다.

이어 이노우에 대표는 “국평사 주지인 윤벽암 스님을 비롯한 재일동포여러분!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 봉환위원회’여러분!

여러분들의 오늘에 이르는 노고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원래 일본이 정부의 책임하에서 다해야하는 유골봉환이 전후 73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이러한 식으로 밖에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일본사람으로서 정말 죄송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드디어 내일 고국분들의 가슴에 안겨서 기다리고 기다린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그곳에서는 여러분을 따뜻하게 감싸주시겠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돌아가신 분들의 존엄이 되살아나면서 그 생명의 존재가 고국의 역사에 새겨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하여 오늘 이 유해봉환사업의 역사적인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인류 보편적 양심운동가로서 이날 조세이탄광수몰사고은폐역사 역시 얼마나 엄혹한 일인지 일본인으로서 그 유골발굴과 수집 그리고 고향반환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활동인지 그 절박함을 호소하였다.

이하 이노우애 대표의 조사 전문(弔辭全文)을 게재한다. 이는 일제강제징용역사의 소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여 한국언론으로서는 최초로 전문을 <광진의소리 역사의 기록>으로 남긴다.

■ 조세이탄광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 공동대표 이노우에 요꼬

弔辭(조사) 全文 ---
일본인으로서 진심의 사과말씀 포함

이하 이노우애 대표의 발표문 조사전문(弔辭全文)을 게재한다. 이는 일제강제징용역사의 소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여 한국언론으로서는 최초로 전문을 <광진의소리 역사의 기록>으로 남긴다.

<弔辭>

발표자 조세이탄광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

공동대표 이노우에 요코(井上洋子)

---

오늘 이러한 역사적인 법회의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조세이탄광물비상을 歷史에 새기는 회‘(長生炭鑛의 水非常-한국식 표현은 ’장생탄광수몰사태‘)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강제연행,강제노동 끝에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은 유골앞에서 위로의 말을 찾을 길이 없고,오직 삼가 명복을 기원드리는 것과 한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국평사 주지인 윤벽암 스님을 비롯한 재일동포여러분!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 봉환위원회’여러분!

여러분들의 오늘에 이르는 노고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원래 일본이 정부의 책임하에서 다해야하는 유골봉환이 전후 73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이러한 식으로 밖에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일본사람으로서 정말 죄송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드디어 내일 고국분들의 가슴에 안겨서 기다리고 기다린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그곳에서는 여러분을 따뜻하게 감싸주시겠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돌아가신 분들의 존엄이 되살아나면서 그 생명의 존재가 고국의 역사에 새겨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입회하지는 못하지만,33구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평온이 차려지기를 기원합니다.

또 이 자리를 빌어서 ‘조세이탄광의 침수사고의 비극’에 대해 소개해 드립니다.

태평양전쟁중의 1942년 2월 3일에 일어난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장생탄광)’이라는 해저탄광(海底炭鑛)에서 대규모 수몰사고가 났습니다.

사고로 숨진 183명의 희생자중 70%를 넘는 136명이 한국사람(조선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중 4명은 어린 10대였으며 20대도 73명이나 포함되어 결혼도 안한 애젊은 청춘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전시중인 대형사고이면서 다음날의 야마구치 아사히신문은 ‘입갱자의 대부분이 구출되었다’고 허위보도를 날렸으며 그후 이 사고는 어둠속에 은폐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현지의 지역역사참구자의 노력이 있어 이 참극이 서서히 밝혀u 갑니다. 그리고 1991년 3월에는 시민운동단체 ‘조세이탄광 물비상을 역사에 시기는 회’가 발족되었습니다.

결성당시에는 불과 10여명밖에 안되는 열악한 단체였지만 현재는 정회원 100명,찬조회원 200명,기부자 100명을 넘어 ‘일본 전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새기는 회’는 희생죈 136명의 조선사람(한국사람/북한사람 함께)과 그 유족에 대해 일본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초는 (1)두개의 피야(배기∙배수관)를 본존한다.
※‘피야’라는 것은 해저의 갱도에서 배기나 배수를 하고 노동자의 목숨을 지키는 역할을 가진 큰 굴뚝같은 것입니다.

(2)사고의 실태를 분명히 하기위해서 사료나 증언을 수집하고 증언집을 작성한다.
(3)희생자 183명 전원의 이름과 일본 사람의 사죄와 반성을 새긴 추모비를 건립한다. 등

이 3점을 목표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특필하야 할 것은 모임이 출범한 그 해에 ‘죽은 자에 대한 편지’를 낸 것입니다. 다행히도 ‘순직산업인 명단’(대일본산업보국회 편/大日本産業保國會 編)을 입수했는데 거기에는 희생자의 이름,나이,주소가 적힌 것으로 사과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희생자에게 보냈습니다.

당장 한국의 유족으로부터 17통의 답장이 돌아왔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 아버지가 일본의 조세이탄관에서 돌아가신 것을 알게된 유가족들도 계셨습니다.

다음해 1992년에는 한국에서 ‘유족회’가 결성되어 1993년이후 시민들의 모금으로 해마당 수많은 유족을 일본에 초대하고 현지에서 추모식을 거행하여 왔습니다.

한국 유족회의 존재가 우리의 운동을 오래 계속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조세이탄광은 금지된 바닷물아래 37m라는 얕은 곳을 파도록 시켰기 때문에 종종 누수가 일어나 위험한 탄광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무서워서 아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민>징용령‘이 나온 1939년이후 1258명의 젊은이들이 조세이탄광에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마구치현 탄광에서의 조선사람비율른 9%였지만 조세이탄광은 무려 80%에 이르고 현지에서는 ’조선탄광‘으로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3∙6m의 담에 둘러싸인 수용소에 수감됐으며,하루 12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할였고,탈주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은 한마디로는 도저히 설명할수 없습니다.

‘새기는 회’가 출범한지 22년,지난 2013년에 드디어 추모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총 비용은 약 1400만엔이 들었지만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모금으로 모두 만들었습니다.

그 ‘조세이탄광추모광장’에는 일본사람측의 추도문으로 “우리는 이런 비극을 낳은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고 다시는 타민족을 짓밟는 듯한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허용하지 않기위해 힘껏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서하고 여기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깁니다.”와,

가해역사에 대한 반성과 강한 반전의사(反戰意思)를 표명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차려진다면 한번 찾아와 주시면 합니다.

우리는 이 운동을 통해서 역사의 진실을 호소해 갑니다. 일본 전국 곳곳에서 탄광,철도건설,댐건설 현장 등에서 강제노역이 이어졌으며,조선사람 여러분의 생명과 생활,삶을 희생시킨 토대우에 지금의 일본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반도분들에 있어서 <모집>이라는 명목의 일본연행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강제연행이나 강제노동의 사실을 부정적인 역사로 은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내버려둔 조선사람들의 목숨이 있습니다. 그들을 역사속에 되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은 첫 일본 방문때부터 <‘유골발굴∙반환>을 우베시 및 야마구치현에 요청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절실하고 비장한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에 출범당시의 ’새기는 회‘에서도,일본인측도 정면에서 마주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2013년 추모비건립이라는 대사업을 이룬 것으로 하여 뒤늦게나마 ‘유골수집 및 반환’을 ‘새기는 회’의 첫 번째 과제로 내세울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세이탄광 희생자의 경우,그 이름도 당시의 연령도 유족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해저에 있는 많은 시신은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는게 아니냐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유해를 인양하고 고향에 돌려주고 싶다,아니 돌려 모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세이탄광의 유골문제를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상징적인 과제로 끌어올려 일한 양국정부가 공동사업으로 유골수집에 대응해 주면 양국화해를 향한 움직임이 크게 가속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전 2월 8일에는 일본 정부관계부처와 첫 협상의 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세이탄광의 비극은 아무도 부정할수 없는 ‘인권’의 과제이며,방치하면 안되는 183명의 고귀한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일정부간에 어려운 정치정세가 있지만 앞으로도 꿋꿋하게,끈질기게 호소해나갈 것입니다. 일본과 한국정부차원,시민들의 공동사업으로 ‘유해발굴 및 반환’을 무슨 일이 있어도 실현할 생각입니다.

조세이탄광의 유족 품에 유해를 반환할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큰 도움을 주실 것을 청합니다.

끝으로 오늘 33구의 말없는 유골이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수 있도록 기원드리며 인사로 하겠습니다.

2018년 2월 27일

조세이탄광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회

공동대표 이노우에 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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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공항 유해 환국부터 전 TV 라디오 신문 인터넷미디어 등 온 국민 뜨거운 관심
일제의 강제징용만행에 국민적 탄식

한편, 작년 8.15광복절기념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봉환 제1차 33위 봉환사는 국내 언론이 거의 잠잠하였다. 오로지 흥행에 휘몰아친 영화 ‘군함도‘보도만 온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막상 70년만에 환국하는 실제유골 33위의 고국환향하는 김포공항엔 그 많은 언론사들이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2차 유해 33위 고국환국 환향식이 열리는 김포공항은 TV,라디오,신문,인터네미디 등 전 언론매체가 북새통을 이루며 취재경쟁 열기로 뜨거웠다.

공항 로비 밖은 칼바람과 비눈이 드센 한파를 몰고다녔다.

하늘도 슬픔을 같이하는 것이었을까.

일본하늘과 동해안 상공을 햇살이 눈시렸었는데 고국땅 하늘은 짙은 먹구름과 간간히 내리치는 빗물로 70년만에 귀환하는 징용희생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슬픔을 같이했다.

용산역 노제시는 드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일제때 처음 집결장소의 쓰라린 추억을 상기했다.
그래서인지 비바람이 더욱 흉흉했다.

남산꼭대기 전망대에서는 아예 유골들이 버스안에서 밖으로 나올수도 없었다. 더욱 더 비바람리 드세졌다.


종로통 탑골공원에 이르러서야 비바람이 약간 자즈러졌다. 99년전 3*1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어르신들의 숨고한 정신의 현장이라서였을까.

서대문쪽 숭국열사사당에 고국의 첫날 밤을 모셨다.

이하 한국행사과정은 국내언론 보도와 본지 촬영 사진뉴스로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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