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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2023재정 ...
“서울 강·남북 발 ...



★뉴스특보! 15일오전11시 자양동추미애의원사무소앞!
지역언론탄압규탄! 중앙및 지역언론 기자회견! 유윤석국장 3보1배출정!

등록일: 2015-09-12 , 작성자: 광진의소리

社告>

9월 15일 오전 11시 자양4거리 추미애의원 사무소앞
지역 미생이 바른언론탄압 추미애의원 규탄 중앙 및 지역언론 기자회견
유윤석 편집국장 지역 미생이언론말살 추미애의원규탄 꽃상여3보1배출정
(추의원 사무소앞에서 여의도 중앙당사 및 국회앞까지!)

2015.9월 12일
광진의 소리

◆추미애 의원 9월 15일 오전 10시 <무고죄> 검찰에 고소장 접수

본지 유윤석 편집국장은 9월 15일(화) 추미애 국회의원(소송대리인 김재형씨 포함)을 무고죄로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접수합니다.
명백한 증거에 의거 사법적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는 내용임을 밝힙니다.


2015.9.12

고소인

광진의 소리
편집국장 유윤석

◆한국자유언론투쟁사(1)

◆““당장 기사 빼세요.” .....

““당장 기사 빼세요.” .....(중략)....

비슷한 일은 동아일보사에서도 일어났다. 10월 23일, 송건호 국장은 수원 주재 기자가 송고한 기사를 사회면에 보도하라고 지시했다. 서울대 농대 수원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했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원고 하나를 막 읽으려 할 때, 기관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수원에서 서울대 농대생들이 시위를 했다면서요?”

“그게 어때서요?”
“대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기사가 나가면 안 됩니다.”

“알다시피 그것은 그냥 뉴스요.”
“당장 기사 빼세요.”

“무슨 권리로!”
“하여튼 빼기나 해요. 그런 뉴스가 나가면 각하께서 싫어하십니다.”

“여기는 신문사요. 기사에 관한 권한은 나에게 있소. 나가시오!”

송 국장이 호통을 치자 기관원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송 국장은 바로 옆의 기자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비중이 큰 기사도 아닌데 저 친구는 왜 늘 저 모양이야?”
“긴급조치가 선포된 뒤부터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더 심해졌어요.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만 해도 감옥에 보낸다는 조항 때문일 겁니다. 신문사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기관원 놈들은 또 얼마나 방자해졌는데요. 내 원 참…….”

기자가 맞장구를 치며 아니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서울 농대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에 관한 기사는 충분히 뉴스 가치가 있었다. 긴급조치의 서슬이 시퍼럴 때여서 더욱 그랬다.
그날 오후, 신문이 가판대에 깔리기가 무섭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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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국장! 그 기사를 빼라고 했더니,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요?”

◆“송 국장! 그 기사를 빼라고 했더니,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요?”

“송 국장! 그 기사를 빼라고 했더니,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요?”
“언론인은 사실을 진실대로 보도하는 사람이오. 내가 틀렸소?”
“잔말 마시오. 어서 끌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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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송 국장은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같은 말을 묻고 또 물으며 진을 뺐다. “빨갱이 같은 놈.” 어쩌고 하면서 송 국장에게 함부로 반말과 욕설을 퍼붓기가 예사였다. 중정 요원들은 함께 끌고 간 박중길 방송뉴스부장, 한우석 지방부장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지거리와 폭언, 구타를 가하며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이들이 남산에서 온갖 수모를 당할 때, 동아일보 편집국에서는 수백 명의 기자들이 귀가를 포기한 채 간부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기협 간부들은 따로 둘러앉아 대책을 논의했다.

“송 국장이 남산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은 좀 심하군요.”
“보통은 열대여섯 시간 정도면 풀려나셨는데, 오늘은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조사할 게 뭐가 있다고…….”
“한국일보 사주와 국장까지 연행된 마당이니,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듯싶습니다. 기협 차원의 단호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당연한 말씀이오. 우리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소! 내일 오전 9시경,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우리 언론인들의 실천선언을 발표합시다.”
김병익 회장의 제안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옳소!”를 연발했다. 이렇게 해서 기협 간부들을 포함한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10월 24일을 기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한 것이다.

이 모습을 뉴욕타임즈, 아사히신문, AP통신, 교토통신 등 외신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이들의 신속한 보도로 자유언론실천선언에 관한 소식이 해외 각국으로 타전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자, 정작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제동을 걸었다.
“당신들이 발표한 선언문을 우리 신문에 실을 수 없소.”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언론인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그런데, 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사화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아무런 기사도 쓰지 않을 것이오.”

신문 제작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며 맞선 기자들은 결국 경영진을 굴복시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사화하는 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거사는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9시 20분경, 조선일보사 기자 150여 명이 편집국에 모여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들은 선언문 채택과 아울러 “1) 자유언론을 수호하기 위해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배제하고, 2) 언론인들이 보도 활동과 관련 부당하게 연행 구금당할 경우 귀사할 때까지 철야농성을 하며, 3) 학생, 종교인 등 각계의 정당한 의사 표시는 반드시 게재한다.”는 등의 3개 항을 결의했다.

한국일보 언론탄압 관련 결의문

같은 날 밤 7시 30분경, 한국일보사 기자 130여 명도 편집국에 집결해 사장과 편집국장의 연행 사실이 한국일보에 보도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은 25일 새벽, “앞으로 민주언론을 사수할 것을 결연히 선언한다.”는 내용의 ‘민주언론 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4개 항의 행동지침을 채택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기자들의 선언문 채택이 연달아 이어지자, 이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경향신문, 동양통신, KBS 등 31개 신문, 방송, 통신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치며 언론자유 수호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심지어 그동안 유신정권의 입노릇을 해온 관영방송과 정부 기관지 및 여당계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까지도 이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 열기가 확산되는 동안 동아일보에서는 당장 중앙정보부에서 내려준 보도지침을 무시했고,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문제를 사설로 내보냈다. 또한, 기관원들에 의해 기사가 삭제되거나 바꿔치기 되는 일이 없도록 자체적으로 기사 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소식지 《알림》에 게재함으로써 문제 해결과 소통의 장을 넓혀 나갔다.

박 정권은 이러한 언론인들의 움직임에 대해 노발대발하며 당장 언론사 경영진에게 압력을 가했다. 경영진은 권력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는다면 가만 안 두겠어.”

1974년 12월 16일, 박 정권은 광고주들을 직접 협박해 광고를 중단시켰다. 이미 광고 재원 의존도가 80%에 달했던 동아일보사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1974년 12월 25일 오전,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 모여 긴급총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광고 계약의 전면적 철회 경위를 즉각 신문과 방송에 자세히 보도하고, 철회된 광고 면을 백지 그대로 제작할 것”을 결의했으나 경영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4년 12월 2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우리는 최근 언론에 대한 당국과, 또는 경영주에 대한 당국의 압력이 한국의 자유언론에 대한 중대한 위협임을 지적, 이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28일에는 NCC 인권위원회와 광주기독교연합회도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규탄하고, 동아일보 구독운동 전개와 성금 보내기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후, 원로 언론인 홍종인이 동아일보를 방문해 격려 광고를 실은 것을 계기로 전국의 수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격려 광고가 봇물을 이루었다. “자유의 횃불을 밝히는 기름 한 방울의 성의를 표한다.”, “우리는 안다. 백지광고의 의미를” “동아, 너의 붓이 곡예를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너의 고난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각양각색의 사연들로 넘실거리는 광고 성금이 동아일보사에 끝도 없이 줄을 이었다. 유신정권의 광고탄압은 오히려 전 국민의 언론민주화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권력에 굴복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끝내 130여 명의 젊은 기자들(동아방송 소속의 프로듀서, 아나운서 포함)을 대량 해고함으로써 모처럼 타오르던 자유언론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조선일보사 경영진도 30여 명의 기자들을 전격적으로 해고시켰다. 이 사상 초유의 대량 해고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에는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해직기자 군단’이 양산되는 재앙이 벌어졌다. 하지만, 언론사에서 추방당한 기자들은 각계각층의 지원과 격려를 받으면서 투쟁조직을 만들어 유신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이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한국 언론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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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으로 제1회 실천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윤이상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

◆유윤석이는 이무렵 사시공부접고 “유신헌법철폐투쟁“건대 선봉장으로 나선다

◆유윤석이는 이무렵 사시공부접고 “유신헌법철폐투쟁“건대 선봉장으로 나선다

대학가 ‘언론의 자유보장하라‘ ---------------

“언론의 자유보장하라!“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긴급조치해제하라!“
“유신헌법철폐하라!‘

당시 대학가의 투쟁잇슈였다.
순수한 ‘자유민주주주의 헌법가치수호 투쟁‘구호였다.

지금처럼 ‘국가보안법폐지하라‘,‘주한미군철수하라‘,‘전쟁연습하지마라‘.‘미국놈은 물러가라‘와 같은 체제와 이념성향의 투쟁잇슈와는 격세지감의 자유낭만시대였다.

‘자유민주주의헌법수호투쟁‘,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쟁취투쟁,자유민주주의헌법쟁취투쟁시대였다.

나 역시 건대의 선봉장이 되면서 위의 잇슈파이팅이 언제나 뇌리에 깊숙히 각인되고 있었다.

당시 건대 안용교 헌법교수의 권위는 대단했다. 형법의 박동희 교수,민법의 김용한 교수(소수설 권위자)는 건대법대의 3대보배였다. 학계에서 인정하는 ‘실력파‘였다.

유윤석이는 학교당국의 배려로 입학성적순으로 선택되면서 ‘건대 법학연구실 고시생‘생활이 시작되었다. 행정학과였지만 ‘사시‘를 선택했다. 법학과 강의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법조계 유명인사들과 사시합격생들의 특강도 자주들었다.

그러나 어느날(건대야간대가 있는 종로낙원동 강의를 받으러갔다가 종로통에서 유신헌법철폐하라며 서울지역대학생들의 연합시위현장 닭장차에서 피터지는 피끓는 학우들의 모습을 ‘처음목격‘하고 엄청난 양심의 충격을 받고,

유신헌법 통달해서 출세하겠다는 비겁한 법대생의 처지를 밤새 통음을 하며 자조하다 최종적으로 불쌍한 전라도 김제농민 부모님께 영원한 불효막심을 용서하라하고(당시는 모든 출세길-공직자의 길- 포기해야 했음), 새벽녘에 붓대를 꺾기로 최종 결단하고 유신헌법첼폐투쟁 건대생 대규모 조직에 돌입한 것이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음) 유신헌법철폐투쟁의 선봉장이 되면서부터 유윤석이는 당시 서울동부경찰서(지금의 광진경찰서) 정보과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당시 동부서 정보과형사들은 한 사람(나중에 얼굴에 테러당하고 의원면직)만 빼고 대부분 유윤석일 온건하게 다루었다. 조서를 꾸리면서 간간히 담배도 한 까치 빼어 불도 붙여주면서,

“야,유윤석이 그 좋은 머리로 그냥 고시공부나 계속해서 검판사되면 니 하고싶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잖아? 농촌의 니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데모(주동) 그만해...“식이었다.

당시 중정(중앙정보부) 담당은 그 유명한 송영인씨였다.지금도 국정원 간부 출신 모임인 국사모(국가를 사랑하는 모임)의 송영인 회장은 맹활략중인것으로 자주 언론이 비친다.

송영인씨는 성질이 괄괄하고 다혈질이다. 당시 건대총장실을 들어갈때는 노크는 커녕 막바로 ‘구둣발길질로 문짝을 박차면서‘ 총장실을 들락거린곤 했다. 나에게 거칠게 다루면서도(주로 막가파 언어) 인간적인 통사정도 하곤했다. “야,윤석아,나 현역중령이야! 너 때문에 죽겠다. 나 아직도 집도 없어. 세산다구?“하면서 그만좀 나서라 했다.

“야,윤석이,거봐,내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안되잖아? 잘 있다가 나와! 나오면 술 한잔 하게“
1980년 5*17 전국계엄확대조치로 즉각 검거된 나는 당시 동부서에 유치되었다. 송영인이 면회를 와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뒤로 착한 사람이 되었으면 술 한잔을 나누자고 하고 싶었는데 ‘빨갱이 소탕 일변도인생‘으로 내닫고 있어 생각만 담고 있다.

송은 당시 동부지역(한양대,건국대,수도여사대,장신대 관할) 중정담당관으로서 항상 동부지역 불랙리스트 제1호는 유윤석이었다. 정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시퍼런 세도속에 유윤석이는 ‘파리한 학생민주양심‘ 하나로 싸워나갔다.

당시 나의 무기는 ‘오로지 헌법가치‘였다. 배후연계세력이 없었다. 강의실에서 배운 ‘자유헌법의 소중한 가치수호의지‘하나였다. 혹독한 조사과정에서 ‘북괴대남용공공작사건‘,‘김대중 연루사건‘(조사관은 같은 전라도출신임을 내세웠다)으로 집요하게 엮으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나는 오로지 강의실에서 배운 ‘헌법가치‘와 종교적 양심(성장과정 기독교영향 컸음)‘을 근거로 정면대결했다.

점점 유신독재의 폭압이 심화되면서 유윤석이는 반대로 점점 건대의 신화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엄청난 학생들의 동원력에 폭발적인 나의 연설사자후 덕분이었다. 그러나 유윤석은 이때 철저히 비타협적 투쟁을 목숨걸고 유지하되 동시에 건대생들에게 ‘비폭력투쟁‘을 잔인할정도로 강변했다. 당시 나는 미국흑인해방인권투쟁의 화신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1968년 멤피스에서 암살당하였다)을 감동적으로 받았다.
(2015년 03월 1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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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눈물의 골짜기이고, 피하고 싶은 길...일지라도 (한나의 눈물)
비록 눈물의 골짜기이고, 피하고 싶은 길...일지라도 () () 우리가 걷는 그 길이 비록 눈물의 골짜기이고, 피하고 싶은 길이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일지라도 순종하며 가면 하나님께서 그 길목에 수많은 생명의 열매들을 불러 모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보람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장외투쟁 불가피! 강자엔 약하고 약자엔 철추를 휘두르는 추미애의원에 항거위해! (유윤석 편집국장)
본지 창간이후 최대위기입니다. 광진구소식취재 밀리는 것 양해바랍니다. (편집국장) 본지의 존폐문제와 걸린 ‘미생이 지역언론의 벼랑끝 위기‘입니다. 법조인출신 4선국회의운의 골리앗과 맨손의 다윗과의 소송싸움입니다. 제가 합법과 동시에 ‘장외투쟁‘을 병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임을 널리 양해바랍니다. <광진의 소리>는 오로지 ‘광진구민의 권익증진과 지역공동체발전의 共同善‘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며 헌신투쟁하여왔음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특정정치인 또는 특정정파를 죽이기위한 신문이 아님은 광진구 지도층인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과 성원을 기대합니다(편집국장 유윤석-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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