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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석국장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봉환‘ 올해도 함께해!
지난 3.1절,8.15민족공동행사위원회 공동위원장,봉환위 대변인 등으로 봉사
등록일: 2018-07-31 , 작성자: 광진의소리
<광진의소리=특집보도>
지난 3.1절,8.15광복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가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국민봉환위원회와 함께 추진한 사업에 공동위원장,대변인 등 역할봉사를 한 유윤석 본지편집국장은,
올해 8.15광복절계기 일제강제징용희생자33구유해봉환국민추모제에도 뜻을 함께 한다.
7월 30일(월) 오후 2시,광화문 인근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금년 8.15광복절국민추모제와 관련 기자회견을 가졌다.
아래는 주요언론의 보도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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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봉환위, 광복절 맞아 35구 봉환추진
▶김홍걸 대표상임의장 민화협도 유해송환 추진해 갈등 가능성도
(서울=연합뉴스) 지성림 기자 =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봉환위원회(이하 봉환위)는 30일 서울 중구 달개비 컨퍼런스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복절을 계기로 희생자 유해 35구를 국내로 모셔올 계획이라고 밝혔다.
봉환위는 오는 8월 14일 김포공항을 통해 유해가 옮겨질 예정이며 그 이튿날인 8월 15일 각계 사회단체와 함께 국민 추모제를 연다고 덧붙였다.
봉환위는 “8·15 광복절을 기념하여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5위를 봉환하여 7대 종교와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 순국선열 유족을 비롯한 독립광복 유족과 각계각층이 한마음으로 그분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민추모제에서 종파와 정파를 넘어 민족이 하나 되어 후손 된 도리를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길 바라며 남과 북, 해외동포가 손잡고 함께 모셔올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다 함께 마음을 모아주시길 간절히 호소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우리는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봉환에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떤 단체라도 함께 하며, 남·북·해외가 함께 민족공동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봉환위의 윤승길 사무총장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을 때(6월 20일) 조만간 유해봉환 남북 공동위원회 구성을 제3국에서 논의하자고 북측과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윤 사무총장은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이 최근 방북해 북측과 일본 내 조선인 유골 송환을 위한 남북공동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고 밝힌 데 대해 “그것은 남측 민화협과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사이의 합의일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북측에서 제정당·종교·사회단체의 합의를 통해 북측 위원회를 구성하고, 남측에서도 제정당·종교·사회단체의 합의로 남측 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남과 북이 함께하는 유해봉환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2008년에 결성된 봉환위는 지난해 광복절 72주년과 올해 3·1절 99주년을 맞아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를 각각 33구씩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다.
이런 가운데 남북 민화협 간 유해 송환작업이 이뤄진다면, 봉환위의 사업과 겹쳐 갈등을 겪을 수도 있어 주목된다.
yooni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7/30 15:10 송고 | ,
| ◆유윤석국장 작년 일본 도꾜 국평사 국민봉환단 대변인으로 법요식참석!
광진의소리 보도기사 일부 --- | ,
| ◆2017년 8*15광복절 유윤석 공동대회장 ‘통곡의 피맺힌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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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사적인 대사업의 뒤엔 숨은 주인공이 있다. 해방 72년만에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무연고자 중심) 한국봉환에 결정적인 결단을 한 분이다. 일본 동경에 있는 국평사 주지 윤벽암스님이다.
필자가 벽암 스님을 직접 만나 ‘말문’을 튼 것은 8월 14일 오전 11시 무렵 용산역 ‘일제강제징용희생자기념 조형물’앞이었다. 전야제 노제참석차 용산역에 나타났다.
일제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집된 징용자들의 집결장소가 용산역이었다. 용산역에서 부산역으로 싣고가서 다시 부산항의 배편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강제이송되어 일본전국 및 사할린 등 일본제국주의 전쟁물자지원의 강제노동자로 공급된 참담한 역사의 시발이 용산역이었다.
-.스님, 이번 일제강제징용희생자유해봉환에 엄청난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셨습니까?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사업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예. 예. 정말 힘들었습니다”
스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못하고 그 과묵한 얼굴 두 눈에서 순간적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쏟아져내렸다.
더 이상 말을 잇지못했다.
더군다나 남과 북이 일촉즉발의 전쟁공포의 험악한 시국의 첨예한 대치정국에서 일본조총련계의 대표로서 한국정부의 공식방한허가를 당당하게 받고 들어왔으니 그의 속마음은 얼마나 감개무량할까?
그도 서울이 얼마나 보고싶었을까?
같은 조국인데....?
기자는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서로 가슴속의 ‘통한의 역사에 대한 격정’만 공유했다.
아래는 M매체(남북관계의 실정법상 실명 미공개)에서 발췌한 윤벽암 스님에 이르기까지 일본 국평사 절에 관한 기막힌 내력이다.
■ 국평사는 남과 북을 하나로 잇는 애국적 절로 이름나 있다.
윤벽암 주지스님은 “일본 사람들은 종교를 믿든 안믿든 죽으면 모두 한곳으로 모인다. 그곳이 바로 사찰이다. 다시말하면 죽으면 누구나 절간으로 가서 등록을 하게 된다. 결혼은 교회에서 할지라도 죽으면 반드시 불교를 거쳐 무덤으로 가게되는 것이 일본의 문화로 되어 있다.”라고 설명한다.
■통일되면 코리아반도 땅으로
지난 시기에는 매장을 했으나 이제는 법적으로 화장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국평사》의 윤벽암 주지스님도 이 사찰에는 250여 세대의 가족묘도 있고 1천여명의 개인들을 화장한 납골당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가족도 연고자도 없는 화장한 조선인들의 잿가루도 방한칸에 무수하게 보관되어 있어 조국이 통일이 되면 코리아반도 땅에 가져가야 할 생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국평사는 문자 그대로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절인데 이곳은 특히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사찰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절은 일본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東村山市) 하기야마조(萩山町)에 있는데 그 규모는 888평이나 된다.
이 절은 377년 전에 세워진 절로서 일본 사원이었다.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의 8대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년 ~ 1751년)의 청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일본 은퇴스님의 절을 한국 유종묵 스님이 인수,통일될때까지 (남과 북 한국인)유골을 모으자며 국평사(國平寺)로 개명
이 절은 은퇴한 일본 스님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수양하던 곳이었는데 이 절을 이어받을 스님이 일본에 없었다. 고승(高僧)에 해당하는 일본 스님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 이 절을 이어 받은 스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다름아닌 일본에 온 한국의 유종묵 스님이다.
유종묵 스님은 이 절에다 조선인 유골을 한 자리에 모았다. 통일될 때까지 유골을 모으고자 했다. 아주 먼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까지 가서 조선인 유골을 다 모아 이 절의 지하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스님은 절 이름을 국평사(國平寺)로 지었고, 이때 제일 먼저 지은 게 유골을 모신 납골당이었다.
■한국이 조선대에 다보탑과 석가탑 모형을 보내주면서...
스님은 이곳 국평사에다 1965년에 3층으로 된 납골당을 지었는데 그 모양은 불국사 다보탑 모양으로 지었다. 지금 이 납골당 안에는 모형 다보탑이 있다. 원래 이 모형 다보탑은 북조선이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인 조선대학교에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남한이 조선대에다 다보탑과 석가탑의 모형을 보내주자 조선대에 있던 이 모형 다보탑이 국평사로 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국평사는 크게 보아 법당과 납골당으로 되어있다. 법당은 원래 지하에 납골당이 있었는데 다보탑 모양의 납골당이 세워지자 모두 이리로 옮겨졌다. 법당 지하에는 지금 석묘가 있다. 놀라운 건 이 법당과 납골당이 마치 산자와 죽은자가 서로 교류하듯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제공의 <고려대장경>과 북측제공의 <팔만대장경>이 만나는 역사적인 곳
법당에서 남과 북이 <고려대장경>과<팔만대장경>으로 만난다. 남측에서는 동양불전연구회가 편찬한 축소판 <고려대장경>(1972)을 보내왔다. 이 책은 합천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한 자 한 자 적어서 축소, 인쇄해서 만든 것이다. 모두 1천부를 인쇄했다고 하는데, 유종묵 스님에게 78번째를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북측이 보내온 것은 <팔만대장경해제> 15권(사회과학출판사, 1992. 평양)이다.
남과 북이 제3국인 일본의 한 사찰에서 고려시대 <고려대장경>과 <팔만대장경>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유종묵 스님은 일제시대 때인 40대에 조선에서 일본 교토대학에 철학공부를 하러 왔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았고 1945년에는 교토에 있는 만수사에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후 총련과 민단 간부들이 유종묵 스님께 공부를 배웠다. 그러다가1965년 교토에서 도쿄로 와서 이곳 국평사 주지가 되었다. 일본에는 불교가18개파가 있는데 국평사는 어떤 종파에도 속해있지 않다.
■창설자 유종묵 주지, “통일되면 국평사는 없앤다”...투철한 민족주의자
윤벽암 스님의 부친 윤일산 스님을 후계로...
유종묵 스님의 지론은 “통일되면 국평사는 없앤다”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유골들을 갖고 조국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국평사의 후계자 생각을 안했고 또 직접 지은 책도 없다. 유종묵 스님을 중심으로 사제간의 계보를 설명할 수 있다. 유종묵 스님의 스승은 한암 스님이다. 그리고 유종묵 스님의 바로 아래 제자는 윤일산(尹一山) 스님이다. 윤일산 스님은 지금 국평사 주지인 윤벽암 스님의 부친이라고 한다. 순서로 보면 한암 스님-유종묵 스님-윤일산 스님-윤벽암 스님, 이렇게 계승되어 온 것이다.
■윤일산 스님의 스승 한암스님,일본 총독부가 제공한 금가사 한번도 안입어
유종묵 스님은 탄허스님과 동반계열
여기에서 한암(漢岩) 스님(1876-1951)은 한국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상원사에 있으면서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암 스님은 참선만 했다. 일본 총독부가 금으로 만든 가사를 한암 스님에게 드렸는데 그 가사를 안 입었다고 한다.
한암 스님에게는 특별한 제자가 셋이 있었다고 한다.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 스님인데 여기서 난암(煖岩)이 유종묵 스님이다. 세 제자 중 유종묵 스님이 일본에 온 것이다. 그리하여 국평사를 매개로 하여 지금의 윤벽암 스님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윤벽암 스님은 이외에도 6.15일본지역위원회를 비롯하여 일제강제징용희생자 유해봉환추진위원사업 및 남북화해 협력사업 등을 정열적으로 지원하며 협력해 왔다. 일본 도쿄 소재 국평사를 비롯, 일본 전역에 퍼져있는 100만구에 달하는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는 사업도 추진했다.<발췌:M미디어> | | 기사에 대한 한줄 의견을 남겨주십시요. 256 남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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