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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석 발행인 4년전 5*18망월동 구묘역에서 하룻밤!
당시 서울과 평양심장부 극한대결구도 탄식! 지금은 북*미간 ‘지루한 삿바싸움!‘

등록일: 2019-05-19 , 작성자: 광진의소리

▲광주 망월동 5*18광주민주항쟁국립묘지 구묘역 이한열 열사 묘소에서 제례의식후 상념에 잠긴 유윤석은 이날 망월동 혼령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하룻밤을 지냈다.(2015.08.09.한여름)/광진의소리



<5*18광주민주항쟁 39주년 단상= 민주화운동 국가인증자 유윤석 발행인>

◆39년전 5월 17일 <전두환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선포>에 의해 자양동 자취방에서 검거된 유윤석(※39년만에 유윤석 비하인드 스토리 일부 처음 공개)


5.18광주민주항쟁 39주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망월동 현장은 예전의 그 정치행태 그대로다.

지금쯤은 각성된 여와 야,국민이 정책경쟁을 통해 광주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한층 성숙된 민주헌정,민생안정의 꽃이 만개하고 동서간 계층간 갈등극소화 ,남북냉전대립구도의 청산을 통한 동북아평화,세계평화의 성지로서의 통일한반도시대가 개막되어야할 시점이 아닌가.

야당은 그렇다 치고 집권세력인 민주당의 동지들에게 더 안타까운 이유다. 우리 모두 보다 더 긴 안목으로 ‘통일조국 한반도정세‘를 조감하자!

나는 1980.5.18.07시경 자양동(당시 성동구) 자취방에서 계엄법 포고령위반(옥외집회시위 주동 등 혐의)혐의로 영장없이 체포검거되었다.(당시 건국대 4학년 재학생)

당시 관할 서울 동부경찰서(현 광진경찰서. 당시 서장 고 한기형 총경. 후에 과로사 순직)에는 서울 동부지역거주 각 대학 학생회 및 각급 동아리 회장단 등 집회시위관련 위반혐의자(주로 의식 동아리 회장단)로 33명이 영장없이 검거되어 남녀구분없이 급조한 임시공간에 유치되었다. 건대생들이 많았고(7~8명) 다음은 고대생들 순으로 잡혀 들어왔다. 세종대 학생대표도 1명 붙들려 왔다.

계엄경찰은 당시 대학생들을 얼마나 순수하게 보았으면 임시유치방을 급조한 공간에 남학생,여학생을 함께 유치했다. 우리는 협소한 공간이지만 남학생,여학생 의식하지 않고 서로 형님,아우하며 평소 캠퍼스생활처럼 지냈다.

그만큼 우리들은 ‘계엄령’자체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중정(중앙정보부) 현역 중령인 서울동부지역 담당 송영인(나중에 국사모 회장)씨도 “유윤석이 내말을 안들어 이렇게 됐지?”하며 “잘 있다 나오라”하고 다녀갔다. 최규하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일부 지역)에서 전두환의 ‘전국비상계엄 확대선포’가 어떠한 거대한 정권탈취음모가 숨겨져 있는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명목상으로는 계엄포고령위반자로 분류되었다. 내용적으로는 대부분 집회시위법 위반혐의였다. 불온문서(반정부 유인물) 소지배포혐의 등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정식 유치장에 유치를 못하고 임시유치공간을 급조한 이유다. 나는 학생들의 호선에 의해 ‘감방장‘으로 선출되었다.

◆5.18광주소식 듣고 경찰유치장 탈출계획

며칠후 나는 ‘면회‘를 통해 “광주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야밤에 ‘집단탈출계획‘을 세웠다. 출입문 폭파조(그러나 실효성이 없다는 학우들의 판단으로 대신 경비담당 경찰관 유도 개문즉시 경찰관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탈출한다는 작전으로 변경), 이후 출입 경비실 및 복도 담장경비 경찰관 물리적 타격조 등 치밀한 계획을 짰다.

월장시(정문돌파대신 허술한쪽 담장을 넘기로)는 모포를 덮어 상해(담장위의 유리파편의 찔림)를 예방하기로 했다. 33명이니 해볼만했다. 심야시간대였다. 당시 우리들의 유치공간은 경찰서 출입문 경비실 바로 옆편에 있는 일반면회객 대기실을 개조한 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치공간’앞으로 경찰들이 밀려들며 책상 등을 와르르르 밀어와 바리케이트를 쳤다. 출입구 완전봉쇄였다. “도청됐다!” 누군가 외쳤다. 나는 즉시 서장실로 붙들려갔다.(당시 한기형 총경.후에 업무상 과로사했다는 순직뉴스 접함).

“유윤석 학생,우리 경찰들을 원망하지 말게. 제일 불쌍한게 우리 경찰이야.” 의외로 커피를 내놓으며 따뜻한 정담을 나누었다. 경찰관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설명했다.

다른 정치적인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이후 난 한기형 서장을 ‘젠틀맨’으로 인식했다. 당시 나는 경찰관들에 대해 단 한마디도 욕을 하거나 폄훼하지 않았다. 다만 공안검사들이 나의 타도대상이었다. 그 당시 나의 검찰관이다.(정정보완.5.24)

한 서장은 면담후 그 뒤로 정보담당 경찰관을 시켜 우리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적어갔다. 대부분 수용시설내 불편한 점과 먹거리였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한기형 서장은 거의 다 수용해주었다. 나중에 정보과 형사 한 분이 귀뜸해주었다. “탈출계획이 다 도청되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순진했던 시절 이야기다.

◆계엄경찰 유윤석 채증사진자료 앨범2권 제시

초기조사시 “나는 데모를 한 적이 없다”며 넉살을 부리며 살짝 페인트모션을 취했다. 그러자 계엄경찰은 즉각 증거물로 ‘앨범 2권’을 제시했다. 그렇게 많이 사진이 찍힌줄은 몰랐다.

10.26이후 건대 학내집회시위 주도장면(당시 학내집회는 허용되고 교외진출은 철통방어했다),4월 본격적인 서울의 봄이 전개되면서 서울대 중앙대팀들이 먼저 간헐적으로 광화문 기습시위를 벌였고 이후 서울시내 각대학 연합시위가 경찰의 허를 찔렀다.

건대시위를 주도한 나는 5월 14일~15일 양일간에 걸쳐 건대황소상 앞에서 ‘민주대장정’을 결의하고, 건대-화양리-한양대 대운동장-금호동-약수동-을지로4가통-종로5가통-종로통-광화문통-안국동-한국일보사골목-경복궁 정문-서울역 광장 등을 관통한 바, 현장주도사진이 앨범 2권에 날자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기가 찼다. 전두환의 사전치밀한 작전(언젠가는 친다는 작전)의 반증이었다.

◆ 서울동부지역 33명중 ‘나홀로 영장‘발부

‘언론의 암흑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소식’(당시의 일반적 표현)이 ‘유비통신’으로 전해졌다. 안에 잡혀있는 게 답답했다. 거의 한달여 불법구금후 계엄사령부는 나 혼자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소공동 계엄사 검찰부에서 본격수사를 받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일제때 여자의 음부-101-의 상징으로 이곳에 감옥을 지었다는 속설을 들었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처음엔 정치범(가슴과 수용실 출입구에 파란딱지부착.사상범은 빨간딱지로 분별케함)이라며 독방을 배방했으나 삼청교육대 대상자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자 정치범들의 독방을 모두 폐쇄하고 일반범들과 합방조치.

나는 그후 운전수방(운전사고방),폭력방(양은이파 행동대장 김 모씨가 빵장.나에겐 독립군학생이라며 동료들에게 잘 대해주라고 엄명을 내리기도),사기방(소위 ‘범털방‘인 경제사범방),간통방(김지미 신고식 사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음),사상범방(빨간딱지.남민전 연루 경북대 황 모 교수가 항소중 독방사용.나는 정치범과 사상범을 합방한 것은 다른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며 황 교수와 함께 즉각 강력항의하여 행정착오라고 사과를 받고 간통방으로 다시 전방조치),간통방 등 전방조치가 심했다.

너무 떠든다(매일아침 전두환은 물러나라 구호외침)는 이유였으나 나중에 알게된 것은 “유윤석이가 김대중한테 돈을 받고 데모를 주동했다는 것을 케서 구치소 보안과에 제보하면 ‘감형조치특혜‘를 준다는 이유때문이라는 귀뜸이 제보되었다. 운전수방에서 한 운전수(영업용 택시기사.운전과실상해죄)가 자기도 직접 제안을 받았는데 교육시 실제로 제보댓가로 감형되어 나간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며 그런데 자기 딸도 서울 D여대 대학생이라서 알려준다며 나보고 “필요이상으로 친절한 척하며 접근하는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라“며 알려주었다.고마운 분이었다.

실제로 몇몇 사람은 집요하게 그러나 아주 편안한 말투로 김대중한테 지원을 받았지 않느냐며 교묘하게 유도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이 문제로 워낰 시달린 차(경찰서에서)라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까지 야비한가 싶었다.

재판은 당시 필동소재 수도계엄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서 받았다.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회 회장단들(주동자들)이(김대중내란음모 가담자를 제외한 각대학 회장단)과 야당 및 재야인권운동 인사들,광주사태(당시표현)보도관련 경향신문 기자,당시 유명한 조폭 양은이파 등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재판장은 별 하나였다. 검찰관은 물론 군 법무관 중위들로 구성했다.

나머지 32명의 학우들은 경찰서에서 모두 훈방조치되었다. 건대 정외과 과대표 O모 군만이 “나는 유윤석 선배와 함께 시위를 계획했다. 유 선배하고 같이 감옥에 가게 해달라”며 야단법석이고 그의 모친까지 불러다가 달래고 있는데 막무가내라며 나보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취조관이 되물었다.

“그 친구는 아직 군대도 안가도 내가 다 시켜서 한 것이고, 노모를 모시는 외아들인데 전과자를 만드는 것보다 훈방해서 학업을 마치도록 하는게 좋겠다”했다. 나의 첫 취조내용과 동일했다. 나는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내가 후배들을 시켜서 한 것이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한 것이 아니다”며 참모들의 공범화를 강력히 부인하여 일괄 훈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나중에 계엄사령부(소공동) 계엄군법회의 법무관들로부터 이점을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다른 대학 대빵들은 참모들을 같이 끌고 왔는데 “야,너는 다 풀어주고 혼자 왔다“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계엄경찰은 그대로 이행했다. 나중에 평화방송쪽으로 간 O군은 나를 원망했다는 소리를 전해들었다. “윤석이 형이 풀어주라고 해서 감옥갈 기회를 놓쳤다”는 불만을 토로했다고 들렸다. 당시 군부독재는 학생운동 전력자는 공무원 시험은 물론,100대기업취업까지도 인사과에 공문을 보내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나는 취조에서 ‘건국대 비상학생회 대표‘로 분류했다. 건대캠퍼스 황소상앞 군중대회에서 뽑혔다. 당시는 ‘정부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학도호국단 체제‘였다. 학도호국단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임은 당연했다. 성난 학생들에 의해서 최초로 건대에서 학도호국단 간판이 철거되었다.

전국 각 대학 ‘총학‘부활.
그런데 건대는 ‘부활 초대 총대‘가 ‘기관의 선거자금 지원설‘이 나돌자 ‘동맥절단 항변사태(결백증명용)‘가 발생하여 학우들의 불신임으로 기능마비상태였다. 황소상앞에서 ‘군중결의‘로 유윤석이 비상대표로 선출되었다.

◆건대에서 광화문까지 1000여명의 시위대 이끌고 민주대장정

‘학생회 비상대권’을 위임받은 유윤석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내일 전두환 퇴진,비상계엄해제 등을 위해 건대에서 걸어서 한양대를 거쳐 왕십리~ 중구~을지로~종로통~광화문~청와대앞까지 진출한다“고 선포했다. 5월 14일이었다. 전두환의 전국비상계엄확대선포 2일전 결의였다.

행동파 유윤석은 다음날 건대생 1,000여명을 이끌고 한양대 운동장에서 한대생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공개집회를 개최한 후(당시 한대생들은 민주화운동 집회시위 불모지였다),왕십리진출을 시도했으나 계엄경찰의 철통방어로 약 2~3시간 최루탄속 공방전을 펼치다 결국 우회전을 결단하고 그야말로 ‘민주대장정‘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한양대 앞에서 다시 회군하여 한대앞 다리를 건넌후 한강지루를 타고 우회전하여 금호동,옥수동 등 나폴레옹처럼 험악한 ‘알프스산‘을 넘은 것이다. 당시 여학생들은 샌들 끈이 떨어졌다며 양 손에 들고 따라오면서 “선배님,저 이런 데모는 대학생이 돼서 처음 해봐요“하며 몹시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맨발로 맹렬히 선두대열을 뒤따라 왔다. 대부분 1~2학년 저학년 학우들,그것도 순진한 지방출신 학우들의 동참이 주류였다.

무적함대가 된 우리는 거친 자갈밭 산등성이 길, 금호동,옥수동 ‘알프스산맥‘을 넘은 후 을지로,종로통을 거쳐 드디어 엄청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광화문4거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각 대학 총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경찰측의 광화문 사수는 필사적이었다. 뚫지못했다.

나는 다시 우회전 작전을 펼쳤다. 목표는 청와대였다.

◆최초로 광화문 정문 뚫어! 그러나 장갑차 공포탄 쏘며 나타나 혼비백산!

마침 건대생 누군가가 “한국일보쪽을 뚫면 돼요.건대야간대쪽 골목은 비어있어요! 경찰이 없어요“하고 외쳤다.

즉시 선봉대를 건대 야간대학이 있는 화신백화점 뒷골목쪽으로 돌렸다. 이미 건대생들은 건대야간대학의 지형지물에 익숙한 점 등을 이용하여 한국일보 옆골목을 홍수물결처럼 쓰나미를 이루며 드디어 광화문 정문을 뚫었다. 시위대의 함성은 하늘을 뒤덮었다. 해질무렵이었다. (광화문 4거리 정면돌파에 막힌 서울시내 다른 대학생들이 건대생들이 한국일보쪽을 뚫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우리쪽으로 엄청난 인파가 휩쓸려 들었다)

나는 광화문 정문을 최초로 뚫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군중들을 향해 맹렬 선동했다.

“학우 여러분, 드디어 광화문(경복궁 정문돌파 의미)을 뚫었습니다. 이제 청와대로 갑시다!“

흥분된 군중들의 반응도 성난 함성으로 광화문을 뒤덮었다.

펑!
펑!
펑!

그런데 갑자기 서쪽편에서 장갑차 1대가 뚜두두두~~~하며 비호처럼 나타났다. 펑!펑!펑! 하는 굉음이 포탄소리처럼 광화문을 뒤흔들었다. 실탄사격인줄로 알았다.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공포탄이었다.

맨 선봉장인 내 눈앞에 육중한 장갑차 1대가 공포탄을 발사하며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굉음의 포탄소리에 내뒤를 따르던 건대생 등 군중들은 순식간에 혼비백산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내 오른팔,왼팔 참모도 벌써 군중속으로 번개처럼 사라졌다. 모두 실탄사격으로 인식했다.

기가 막힌 것은 장갑차 공포탄소리에 혼비백산한 군중들가운데 일부는 당시 광화문 우측 북단에 위치한 치안본부건물내 빈터로 우르르 도피했다. 수백명이 도망쳐 들어온 곳이 포도청 앞마당이었다.

건대 학생처 직원이 다음날 나에게 알려주었다.

“야,윤석아,치안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건대생들이 수 백명 잡혔는데 ‘모두 훈방조치‘한다며 와서 데려가라는 전화가 왔다. 왜 훈방된줄 아니? 조사를 해보니 전부 건대생들인데 대부분 1~2학년인데 거의 다 지방출신이라 치안본부건물인줄 모르고 빈공간이 넓어서 무조건 들어왔다하여 어이가 없어서 전면 훈방조치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후배들도 나에게 똑같이 답변하여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치안본부 총책임자(치안본부장)가 시골출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내 뒤편 군중들이 텅빈 사실만 알고 오히려 나는 장갑차가 나타난 서쪽 방향으로 내달려 몸을 피신했다. 장갑차부대 대열은 약 2km 후방배치상태였기 때문에 종합청사 뒷편 식당으로 피했다. 식당 주인아줌마는 학생임을 알고 조심하라며 의자를 내주며 따뜻한 차를 대접했다.

당시 광화문 주변은 ‘데모학생들을 숨겨주면 처벌을 받는다‘는 유비통신도 난무했기 때문에 나는 ‘도 아니면 모‘식으로 식당으로 뛰어든 것이다. 다행히 ’시민천사님‘을 만난 것이다. 당시 을지로,종로통의 장사하는 분들도 대부분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였다. 음료수를 건네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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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장 대기실에서 ‘광주학살 첫 소식’ 알게 됨. 동부지역 검거33인중 나만 ‘정식 구속영장‘떨어져! 군사재판에 회부!

다시 동부경찰서 유치공간!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발포경고방송‘이 출입구 경비실 흑백TV 뉴스로 전해졌다. 언론은 계엄군의 공식발표 외에는 모두 중세암흑시대였다.

며칠후 ‘광주지인들의 소식‘이라며 “광주에서 전남대생과 중앙여고생,일반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많이 죽었다“는 전언이 내게 전해졌다.

당시 대학생들의 제1의 주장은 ‘전두환은 물러가라‘,계엄령(일부지역 대상)을 해제하라!“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였다. 신현확 국무총리의 2원집정제 구상도 분쇄의 대상이었다.

◆유윤석의 배후조종세력은 야당인사나 선배가 아닌 오로지 ‘정통민주 헌법정신!‘ ‘외로운 늑대‘,‘광진구의 IS별명‘도 생겨.

나는 건대의 파이팅잇슈로 1)전두환은 물러가라 2)계엄령을 해제하라! 3)유신헌법 철폐하라! 4)언론의 자유 보장하라! 5)사법부 독립을 보장하라! 6)노동3권을 보장하라!를 건대의 파이팅 잇슈로 확정하고 이를 시종일관 반복했다. 지금도 유윤석이가 ‘언론탄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연유다. 40년전 청년대학생시절 피맺히게 목숨을 걸고 투쟁한 소중한 민주헌법의 가치가 아닌가.

당시 유윤석의 특징은 야당 또는 선배들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정세판단을 내리고 행동화한 점이다. 이 점때문에 유윤석은 매번 사건관련 조사때마다 “배후를 밝혀라!“며 갖은 시달림을 받았다. 늘상 배후세력 맨 꼭대기엔 ‘김일성‘~남일 북괴대남공작 총책‘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아래로 재일조종련대남공작책~김대중~이철 서울대 총대~전국 각 대학총책‘으로 가나다 순으로 건국대 = 유윤석‘식으로 몰아갔다. 건국대 학생 고첩(고정간첩)이라는 조작극이다. 최근에도 정보기관은 ‘유윤석=7년치 이메일 등 전기통신 사찰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항상 혹독한 조사과정을 거쳐서도 내가 자유로운 이유는 유신헌법독재시절 당시 나는 사법고시 준비생으로 헌법,형법 등 공법(公法)에 강한 흡인력을 느끼고 특히 당시 사법시험 출제위원인 헌법학 소장파로서 권위가 인정된 건대 안용교 교수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유신독재헌법이 아닌 세계자유진영의 보편적 정의, 정통 자유민주주의 헌법가치를 대한민국수호의 최고의 가치로 높게 평가한 것이다.

나 스스로 헌법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누구의 조종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유윤석이가 ‘건대 호메이니‘,‘아나키스트‘,‘외로운 늑대’,‘광진구의 IS‘라는 별명이 붙게된 연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 자료화면의 논조처럼,5.18광주학살사건이 한국학생운동의 대 전변을 일으켰다. 정통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가 부정당하고 ‘자유우방국가,맹방인 미국=광주학살정권의 방조범’으로 인식되며 ‘양키 고홈’구호가 소수파의 목소리로 터지기 시작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이 미군에 있는데 어떻게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학살작전‘을 펼쳤느냐는 논리가 제공되었다.

◆한국 좌파발생의 원인제공자는 ‘전두환‘! 양키고홈,미군 철수 등 한국한생운동사의 대전변 일어나!

급기야 위 화면의 글처럼 5.3인천사태(필자도 당시 민추협 조사부 차장으로서 하루종일 현장 동참)를 계기로 ‘양키 고홈,미제축출 구호’가 대중적으로 대폭발을 일으켜 당시 보수정통야당을 강변하던 신민당 지도부에 충격파를 안겼다.

이후 각 대학에 ‘주사파’(NL)가 학내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전대협이 꾸려지면서는 전국 대학의 주류가 되었다. 미군철수,반미운동 등 공안당국과 정면대결로 치달았다.

나는 대선배로서 “홧김에 서방질한다더니 이 지경까지 왔다“며 후배들을 위로는 했지만 ”그렇다고 북한식 체제이론을 우리의 지도노선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며 강력히 선을 그었다.

”북한체제 역시 부자세습의 기형적 사회주의체제이지 순수 정통사회주의는 아니지 않느냐? 이는 남한의 전두환 파시스트체제와 함께 타도의 대상이지 우리가 계승할 체제는 아니다“며 아예 공개적으로 ’건대학생회관 대형 유리창에 대자보로 내걸었다. 유윤석 건대학원자율화추진위원장 명의였다. 당시 어용학생회 학도호국단은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후 유윤석은 민추협에서 나와 민중당창당 멤버로 가담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자,농민,도시빈민 계층을 대변하는 PD계열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통일문제만큼은 유윤석은 PD노선도NL노선도 모두 거부했다. 중도좌우통합노선을 일관되게 주창하고 지금까지 ’외로운 늑대의 길‘을 걸어왔다.

◆1980.5.15.서울역 회군의 명암


1980.5.15.서울역 회군을 놓고 일부에서 ‘자성론‘이 제기되었다.서울역을 사수했으면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못했을것이라는 주장이다. 경인지구 사상 최고의 학생시위인 이날 시위대가 서울역에서 철수하지 않고 계속 연좌집회를 했으면 ‘광주대신 서울역에서 피바다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이상 5.22보충)

당시 서울역 광장엔 경인지구 대학생 10만여명이 총결집해 ‘전두환군부독재등장’을 결사항전 반대하였다. 서울역 그릴(2층 커피숍)에서 경인지구 대학생 대표자회의가 향후 투쟁방향을 놓고 난항을 거듭했다. 효창동 공원에 ‘공수부대=전두환부대’가 떴다는 유비통신도 날아들었다. 동교동 김대중 통신은 언론을 통해 ‘대학생들의 신중한 처신’을 요구했다. 군부에 빌미를 주면 안된다는 경고였다.

대학생 대표자회의는 ‘서울역 사수파’와 ‘일단 각대학 귀교파’로 의견이 갈렸다. 사수파는 어차피 군인들이 판을 장악하고 있으니 ‘결사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귀교파는 ‘남대문 전경 버스사망사고‘가 심각하기 때문에(시민과 경찰의 대치중 한 시민이 버스를 탈취하여 전경대열 뒤편에서 버스를 몰고나와 전경 1명이 사망한 사건.

당시 필자는 바로 그 전면에서 건대생들을 지휘하고 있었다.나중에 계엄군에 의해 엄청난 조사를 받음) 일단 귀교후 대응을 하자는 신중론으로 갈렸다. 결국은 귀교하기로 최종결론이 났다. 동아일보 기자가 줄기차게 필자를 뒤따랐다. 후속행진의 방향을 물었다. 우리는 모두 공식발표외의 개인발표는 일제 금기였다.

“여러분,오늘은 이것으로 집회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각 대학별로 귀교하십시요!”

지휘부 단상에서 서울대 대표가 공식발표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철수하면 안된다. 지금 군인들이 계엄령을 선포하려 명분을 찾고있다”며 ‘서울역 사수론‘을 맹렬 주장했다. 특히 지휘탑 맨앞을 차지한 이대생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단상의 공동지휘를 맡고 있던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대표자 회의 결론은 존중하자,신중론을 따르자고 재차 설득했다. 그러나 일부 흥분한 군중들의 저항도 드셌다.

“여러분, 애국가를 부르고 해산하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해산을 선언‘했다. 애국가를 선창했다.

삽시간에 서울역 광장에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짙은 어둠이 광장을 엄습해왔다. 동서남북 각 대학 지휘부는 귀교길에 올랐다. 나는 건대생들 수천명을 이끌고 퇴계로~왕십리~화양리~ 건대귀교로 막을 내렸다.

이날은 토요일이다. 내일 일요일 쉬고 월요일 다시 서울역 집결을 준비했다. 나는 자취방에서 ‘남대문 전경버스 충돌 사망사건’이 건대생들 앞에서 발생한데 대해 1차적으로 도의적 책임을 의식하고, 먼저 ‘간단한 위령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5월 17일 새벽 0시를 기해 전두환이 칼을 뽑았다. 경인지구 대학생 대표자들은 이대 강당에서 심야대책회의중이었다. 필자는 남대문행사 준비를 이유로 ‘건대 부짱’을 대리참석시켰다.

‘전국비상계엄 확대선포’
5월 17일 새벽 0시 효력발생! 모든 집회시위 등 금지! 야당인사,학생운동 지도자 등 대대적인 검거작전 개시!

◆유윤석 광진구 47년차 ‘방랑귀신‘, 오로지 ‘한길로‘

나는 18일 오전 07시경 자양동 자취방에서 검거되었다. 이후 군사재판을 받고 대학은 퇴학조치당하고 한많은 방랑의 인생길이 다시 시작되었다. 광진구에서 47년차 방랑의 귀신이 되고 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으려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5.18광주민주항쟁 39년차,
아직도 한반도의 남과 북은 늪이다.

분단의 깊은 강물을 걷어내고 진정한 한반도평화의 새지평을 열자.
남과 북,모두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도좌우중심세력이 새롭게 양날개를 젓자.

미국과 중국,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분단의 책임당사자들이다. 미국은 가쓰라 테프트 밀약(한일합방 전초전으로 우리 한민족이 제국주의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미국-일본 ‘을사늑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역사적 비극)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4강은 당연히 남과 북의 통일비용을 분담해야 옳다. 더 이상 분단열차에 편승하지 말라. 모두 동북아시아 한반도 남과북 평화공동번영의 공동책임자로 임하라.

남과 북의 최고 통치자 역시 세기적인 결단을 준비하라!
전 세계를 다시한번 감동의 도가니가 되게하는 ‘위대한 한반도평화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라!

아니면 ‘공멸의 길‘을 피할수 없다.

▼2014년 8월~9월/유윤석,한반도평화염원남북한10대강 자전거순례
- 중국 지안시 광개토대왕유적지에서 분단조국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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