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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우전광복회 회장 유윤석마지막인터뷰 다시보기
‘마지막 광복군이 바라보는 오늘의 남북전망대‘ 13년전 인터뷰
등록일: 2019-02-24 , 작성자: 광진의소리
<특집>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강제징병된후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하여,광복군에 들어가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조국해방투쟁에 투신, 해방을 맞고 1948.남북협상차 평양행 백범김구수행비서,이후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를 올바르게 증언하며 광복회를 바르게 추스렸던 마지막 광복군 역사의 큰 별이 먼 먼 세상으로 사라져갔다.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 별세!
<日제국군대에 강제징병됐다 탈출해 광복군 입대…美OSS서 독립운동가와의 연락업무도!>
광복군 출신으로 광복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김우전(金祐銓) 선생이 20일 오전 8시 12분경 별세했다. 향년 98세.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재일(在日) 학생 민족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 고유문화유지계몽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돼 중국으로 파병되자 부대를 탈출해 그해 5월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이어 중국 제10전구 중앙군관학교 분교 간부훈련단 한광반을 졸업한 뒤 곧바로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미국 제14항공단에 연합군 연락장교로 파견됐다. 1945년 3월 한미공동작전계획(OSS 훈련)에 따라 미군 OSS(국방부 전략지원사령부) 본부에서 광복군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암호문을 제작하고,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락 임무 등을 수행했다.
같은 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기요(機要)비서(기밀을 다루는 중요한 비서)에 임명돼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해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로 일했다.
◆8순 고령의 김우전 선생,유윤석과 함께 평양남북공동행사 참석 통일역사운동에도 앞장서!
한편,유윤석 본지 발행인은 2005년 10월 3일 개천절민족공동행사 대변인으로 평양방북시 김우전 선생은 방북단 단장(당시 8순 고령)을 맡았던 인연으로 개인적인 친분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북측과 공동보도문 등 역사적인 문서를 작성할 때 유윤석은 김우전 단장을 대리하여 모든 초안을 작성하고 북측과도 사전에 내용을 조율하는 등 실질적인 남북관계정상화노력에 함께했다.
북측은 이때 김우전 단장의 연설문 내용에 민감했다. 사전에 팩스를 통해 충분히 연설문내용을 상호체크하고 조율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군릉행사장에서 공식행사가 개회되기 5분전까지도 북측은 예민했다.
-.(북측 실무책임자)대변인선생,진짜 서울에서 보낸 연설문하고 지금 발표하는 연설문하고 내용이 같은겁니까?
“(유윤석 대변인)토씨 한자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낭독할테니 걱정마십시요“
-. 아.예.
북측은 김우전 단장의 강골적인 성격을 철저히 파악했다는 암시였다. 김일성-김정일후계체제에 대한 쓴소리가 원고없이 돌발발언을 우려했던 모양이다.
김우전 선생은 이후에도 각급 남북공동행사(3*1절민족공동행사,8.15광복절,10.3개천절민족공동행사 등)에 함께 참여하고 개인적으로는 유 국장이 대한화보 편집국장시절 “마지막 광복군 특집 인터뷰- 다시보기 기사참조)”를 흔쾌히 응해주시어 최초로 임정당시 작성했던 광복군 암호문체계문서를 공개(인터뷰 중간에 불현듯 양해를 구하고 지하창고롤 내려가 한참후에 중요문서를 들고 나오셨다)하여 세상에 알리는 계기도 가졌다.
한편,김우전 회장의 비보를 접하고 민족진영 대표단 5명이 서울중앙보훈병원에 조문을 한 바,유윤석은 김우전선생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알수 없는 ‘전률’이 온 몸에 꽂히기도 했다.
북미회담의 낭보메시지일까,아님 파국을 알리는 암시일까?
쌍방희비곡선을 타면서 님의 명복을 빌었다. 북미회담의 성공을 빌뿐이다.
님이시여,영면하소서.
2019.2.24.
광진의소리
발행인/편집국장
(전 개천절민족공동행사 대변인)
유윤석
**아래는 13년전 대한화보 편집국장시 김우전 광복회 회장 인터뷰 <다시보기>다.
지금 남북상황과 대단히 유사한 시대상황임에 전률이 일기도 한다.
독자님들의 참고를 위하여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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