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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대한황실박물관 해양연구소 목포박물관으로 개칭해야
김민수 <독자논단>

등록일: 2011-09-22 , 작성자: 광진의소리

*아래 글은 김민수님의 본지 자유게시판에 올려진 독자투고글입니다. 장문의 글이지만 문화재청에 관한 많은 의견들이 담겨있어 전문을 <독자논단>형식으로 메인뉴스로 게재해드립니다.(편집자 주)



문화재 관리 사무를 관장,총괄하고 법적,제도적 조치를 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를 사전적,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는 문화재청은 문화재 관리 제도 개선,경영 기획,문화 교육,정책 홍보 및 지방자치단체,문화재발굴법인,문화재수리업체,교육연구기관,문화재관리기관 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하며 발굴 조사,보수 복원,전시 기획 기능이 완벽하므로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을 문화재청 소속기관으로 이관 및 현충사,칠백의총 충남 이양,문화재보존과학센터 법인화,해양문화재연구소를 목포박물관으로 개칭하고 발굴조사,수리 기능을 민간 이양하여 본청(문화재사범단속팀 신설),대한황실박물관(교육홍보과 신설),황실문화재관리소(궁,묘,단,전,능,원 통합),지방박물관(직급 및 정원 조정),한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재연구소(부서 통폐합)로 직제 개정해야 한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관리체계를 전문화,특성화하고 황실문화재,지역 연고,국가 귀속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문화재는 조직,전문인력에 의한 사전적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므로 대한황실박물관,지방박물관의 직급 및 정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문화재의 특성과 지역 연고에 따라 황실문화재는 대한황실박물관으로 국가귀속하고 종교문화재는 종교법인으로, 지역문화재는 지방박물관으로 각각 이관하여야 하며 경희궁,운현궁,별궁,행궁,황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장충단,조경단,영희전,장생전,만녕전,장녕전,화령전,집경전,경기전,장릉,준경묘를 흡수,통합하여 경운궁에 황실문화재관리소를 신설해야 한다.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천제(天祭)를 봉행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황단(皇壇)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황단(皇壇)에 나아가 환구제를 봉행하고 1대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북악산)과 목멱(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황단(皇壇)을 축조하였으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8월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 늑결로 대한제국 강제 병합한 일제 총독부가 1913년 대한제국 황단(皇壇)과 황궁 경운궁의 동편 권역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 정기를 훼손하였고 경운궁은 원형 복원이 가능하지만 황단은 원 위치 복원이 불가능하며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8각 3층 건물로 황천상제,황지지 신위를 봉안한 황궁우(皇穹宇)와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는 돌로 만든 석고(石鼓) 3개,정문만 남아 있다.

총독부가 황단과 경운궁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경운궁과 황단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를 철거하고,경운궁 대안문과 황궁우 석고단 사이에 황단을 복원하여 고조 광무제가 친히 황단에서 제사드린 친사환구의를,경운궁 태극전에서 고조 광무제가 황제위에 오르는 등극의,고조 광무제의 조칙을 반포하는 반조의,황태자가 고조 광무제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문무백관들이 고조 광무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의 환구제를 봉행해야 한다.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후 선조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宮)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15대 광조(光祖)가 이 궁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으나 일제 통감부가 격하시켰으므로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한다. 1623년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2월 20일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비로소 대한제국 황궁(皇宮)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1900년 궁장 공사가 완성되고 1901년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가 가설·개통되었으나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 늑결을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했으며 11월 17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가 통감이라고 규정했다.1907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킨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경운궁 궁호(宮號)를 덕수궁으로 격하시켰고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대한제국 황태자가 지방을 순행(巡幸)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일제 통감부와 정미칠적의 강박)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 즉위(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과 친일 내각이 황제 양위로 둔갑)로 왜곡,선전하였다.

경운궁(慶運宮)은 경희궁 사이에 후원 상림원(上林苑)과 영성문(永成門) 포덕문(布德門) 대안문(大安門) 인화문(仁化門)이 있으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황태자가 대리청정 시작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석조전(연지(蓮池),거북상),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 경효전(景孝殿),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붕어한 석어당(昔御堂), 고조 광무제가 외국 사절을 접견한 준명당(浚明堂),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 대한제국 황실 사무와 근대적 광무개혁을 추진한 궁내부(宮內府),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가 있다.


1897년 황궁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한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황단(皇壇)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3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으므로 조선은 국호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해져 황단(皇壇)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3한(三韓) 영토를 통일(統一)하였다. 태조(太祖) 고황제가 용흥(龍興)하여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욱 넓어져 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탐라(耽羅: 제주도)을 거두어 탐라에서 귤과 풍부한 해산물을 공(貢)하였고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말갈(靺鞨: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이르는 영토를 통일(統一)하는 업(業)을 세우셨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고 상제(上帝)께서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셨다.

고조(高祖)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종묘를 태묘(太廟)로,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여 고쳤으나 일제가 격하시켰다. 1895년 일본군에 살해된 왕후 민씨(閔氏)를 대한제국(大韓帝國)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였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비로소 거행하였고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였다.


일본이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국경선을 임의로 획정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적으로 표기한 왜곡 교과서의 검정 승인에 이어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청서,방위백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외교청서,방위백서 발간,교과서의 검정 승인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침략 도발이므로 즉각적인 영토주권 침해의 시정을 촉구하고 국제수로기구(IHO)에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영문 표기 환원을 요구해야 한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Korea)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를 표기한 고지도를 상설전시, 교육홍보하고 역사적,국제법적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확립하여 대한국(大韓國:Korea) 114년 역사를 바로세우고 일본 정부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9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 한반도 제주도 간도(間島) 대한해(Sea Of Korea) 독도(Dokdo) 울릉도(鬱陵島) 대마도(對馬島)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국(大韓國)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하고 대한제국 한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으나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은 독도를 울릉군 소속이라고 밝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이며 울릉군에 소속된 행정관할구역임을 확인하였으며 1907년 현성운(玄聖運)이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와 현공렴(玄公廉)이 1908년에 제작한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 대한해(大韓海)로 표기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불법 병합하고 1929년 대한해(Sea Of Korea)를 일본해로 몰래 바꿨으므로 국제수로기구(IHO)는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영문 표기를 환원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과 한반도와 제주도,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 등 영토를 되찾았으며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제주도,울릉도,독도(獨島)를 일본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를 계승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는 1952년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인 독도(獨島)를 포함하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선포하고 1954년 독도(獨島)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를 새겨놓았다.


1897년 10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건국(建國)한 근대적 자주독립국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가 1899년 8월 17일 반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령 발포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條約) 체결권·선전 강화권·사신 파견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강점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고 독도를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여 1900년 10월 25일 고조 광무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 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하였다.1909년 9월 간도 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 늑결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이범윤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했다. 1905년 11월 17일 늑결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자 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907년 7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네덜란드에 특사(特使)로 파견했고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일제가 강제한 을사늑약을 폭로하려 했던 고조 광무제의 계획은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대한제국 대표들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 이위종 특사의 ‘대한제국을 위해 호소한다‘는 연설은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 20일 고조 광무제를 무력 동원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 황실 황위 승계 서열 1위 의친왕 대신 어린 영친왕을 영친왕비 민갑완(閔甲完)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7월 24일 군대 해산,사법권·경찰권의 위임,법령권 제정·관리임면권 간섭하는 정미늑약(丁未勒約)을 늑결했다. 1910년 8월 16일 일제 통감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경술늑약안을 밀의(密議)하고 18일 내각회의에서 경술늑약안 합의를 보게 한 후 22일 대한국 황제가 불참한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치게 하고 29일 한일 병합을 공포하였으나 통감부(統監府)가 조약 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술늑약(庚戌勒約) 처리를 강행했으며 대한제국 조약 체결권자 고조 광무제의 조약 체결 친필 서명없이 일제 통감부가 조약 관련 주요 문서들을 위조(僞造)하였으므로 경술늑약(庚戌勒約)은 불법 무효하다.


1904년 2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고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1897-1919)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을 통한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노골화했고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독점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 늑결을 강요했다. 일제(日帝)는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을 위해 고조(高祖) 광무제에게 협박을 거듭했으나 불응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고조 광무제가 불참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이토 통감은 을사5적(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統監府)는 대한 황실 궁내부(宮內府)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여 교육기관,연구기관,문화기관과 외국에서 불법 소장중이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1일 대한 황실이 창경궁(昌慶宮)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일제 총독부에 의해 대한제국 문화재 조사 수집 또는 강제 기탁 불교문화재,도굴 및 구입 장물과 함께 경복궁,경운궁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불법 반출 또는 서울박물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고궁박물관은 황실박물관(Imperial Museum)으로 개칭하고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외국으로 불법 반출 후 환수하였거나 불법 이관되어 교육기관·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KOREA·태극기·애국가·대한국국제·국새·칙령(勅令)·실록·의궤·일기·등록·법전·어찰·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독도(獨島)·간도(間島) 및 도성궁궐도·대한 황실 및 궁궐 유리원판 사진 등 대한 황실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대외관계실을 신설하고 통치체제실을 확대개편하여야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KOREA,대한국국제,태극기,애국가,국새,어보,칙령,실록,의궤,일기,등록,법전,어찰,백자,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독도(獨島)·간도(間島)·도성궁궐도, 궁궐 및 대한 황실 유리원판 사진,황실 복식,환구제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국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안전 관리하고 전문가 및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건국한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0년 황자(皇子) 의친왕(義親王), 영친왕에게 친왕(親王) 책봉(冊封)하였다. 고조 광무제는 명성황후 민씨,귀인 장씨,귀비 엄씨,귀인 이씨, 소의 이씨,귀인 정씨,귀인 양씨 등 총 7명의 황후,후궁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皇子)들이 있었고 고조 광무제와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경운궁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9년에 대한제국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했다. 제정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9월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은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의 후손인데 의친왕(義親王)과 10여명의 후궁 사이에 13황자 9옹주가 있으며 공주는 없었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의친왕(義親王)은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친일파가 득세하였고 1910년 8월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간도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붕어(崩御)하였다. 대한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을 태묘 정전에 부묘(祔廟)하고 영친왕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한다.

대한제국 고조(高祖) 광무제는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하였으며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무효이고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9월 상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 후 득세한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던 귀인 엄씨이고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되고 택일하여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토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된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을 기다리며 책을 벗삼아 지냈다.

전제군주제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됐다. 대한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高祖) 광무제는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고 1910년 8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불법 무효이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민주공화정으로 전환되어 대한제국 황제의 치세는 1919년 4월에 끝났으며 심청색 이화문 적의(翟衣)는 대한제국 황후,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이다.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하고 영친왕릉에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해야 한다. 고궁박물관은 제왕기록실과 대한제국실의 대한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 광무제(1897-1919),2대 순종 융희제(1919), 황태제(皇太弟) 의친왕,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으로 바로 기술하여야 하며 대한제국실의 영친왕비 사진을 민갑완으로 교체하고 왕실생활실의 심청색 이화문 9등 적의(翟衣)를 대한제국 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봄 ,여름,가을,겨울의 사시,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영절(令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치,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금천교 안쪽 좌측에 규모가 큰 재궁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되어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2대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 그리고 순정황후 윤씨(純貞皇后 尹氏)의 능이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一 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홍전문까지 문인석·무인석,기린·코끼리·해치·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중앙에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으며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 남아 있다. 서울시,경기도, 강원도에 소재한 조선시대(1392년-1897년) 506년 동안 존속된 25대 국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국왕과 왕비의 릉 및 대한제국시대(1897년-1919년) 황제릉을 조선 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하였는데 문화재청은 연조(燕祖),광조(光祖) 묘호(廟號) 추존 및 왕릉 능제 격상, 완친왕릉 능제 격상,영친왕릉에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하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의 능제를 격상하고 황제릉 능호를 부여하여야 하며 조선 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을 재지정하고 교육홍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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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요망 (편집국장)
위 글의 주인공 김민수님은 저희 편집국에 사진(명함판)과 약간의 프로필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 주소:y2s777@naver.com
기고가 명의 정정 (편집부)
위 글은 광진구 향토사학자 김민수님께서 “자기 글이 아니다.정정보도해달라“는 전화요청에 의거 같은 이름(동명이인)의 독자글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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