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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淨土寺) 앞 인조 태실(胎室) 낙생 태장리 연산군 태실 판교원(板橋院) 낙생행궁
등록일: 2021-11-18 11:03:58 , 등록자: 김민수 정토사(淨土寺) 앞 인조 태실(胎室) 낙생 태장리 연산군 태실 판교원(板橋院) 인근 낙생(樂生) 행궁(行宮)
대권주자 김민수 http://blog.naver.com/msk7613
1626년 8월 1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전(大殿) 태실(胎室)을 봉심(奉審)하고 조성(造成)할 것을 전례에 근거하여 계품(啓稟)하였는데, 성상께서 성비(聖批)에 ‘형식적인 일을 나는 매우 싫어한다. 봉심하지 말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은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여 주시고자 하는 지극한 성상의 뜻을 공경(恭敬)하여 우러러보고 사모(思慕)하는 흠앙(欽仰)합니다. 그러나 만일 조성하여 표시하는 봉지(封識)하지 않으면 후일 필시 그 곳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해 사(司)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대전(大殿)과 왕세자의 태장(胎藏)이 모두 돈의문(敦義門) 밖 연서역(延曙驛)과 연희궁(衍禧宮) 사이의 정토사(淨土寺) 전봉(前峯)에 있다고 합니다. 정부(政府)와 예조 당상,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 각 1원(員)이 가서 그대로 안장되어 있는가를 봉심(奉審)할 일을 길일을 가려 거행하도록 하소서.“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수직군(守直軍)을 정해서 나무하고 꼴뜯고 가축을 기르는 초목(樵牧)만을 금하도록 하라.“하였다. 1451년 1월 22일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박연(朴堧)이 상언(上言)하기를 “왕실 아기씨의 태(胎)를 안장한 태봉(胎峯)의 아래에 절이 있는 곳에는 오래 살도록 빌어 축수하는 축령(祝齡)하는 곳으로 삼으소서.”하였다. 문종에게 풍수학(風水學)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태봉(胎峯)에 너무 가까이 사람이 거주하면 화재가 가히 두려우니 임금의 능(陵)이나 태실(胎室)의 경역(境域) 안인 도국(圖局)의 밖에 옮기소서.”하였다. 1476년 11월 7일 전 날 밤 3경 5점(三更 五點)에 연산군인 원자(元子)가 탄강하였다.11월 28일 성종이 전교하기를 “연산군인 원자(元子)의 태를 안태(安胎)할 만한 땅(태봉산)을 경기(京畿) (낙생 태장리)에서 고르도록 하라.“하였다.1477년 10월 8일 성종이 낙생 행궁(樂生 行宮)에서 환궁하니 6조(六曹)의 당상(堂上)이 살곶이 전관(箭串)으로 나와서 맞이하고 백관(百官)들이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지영(祗迎)하였다. 10월 14일 어가(御駕)가 과천(果川) 마계동(磨溪洞)에 이르러 구군(驅軍)이 몰이를 한 짐승을 임금이 쏘아서 잡는 타위(打圍)하는 것을 구경하고 검열(檢閱) 최진(崔璡)을 보내어 날짐승을 태묘(太廟)에 천신(薦新)하였다. 저녁에 판교원(板橋院) 인근 낙생(樂生) 행궁(行宮)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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