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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보!일제강제징용 15세소녀 국내공장탈출기 최초공개(육필원고)
일제강제징용 부부 고 김진직 장수옥 국란4란피해 슬픈연가(연재1)

등록일: 2019-02-05 , 작성자: 광진의소리

▲일제만행의 자료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샵/광진의소리

<특보>

<<국권상실 분단조국비극의 현장 증언= 유윤석 기자>>

어느 할머니의 일제강제징용 국내공장탈출 육필수기가 본지에 입수되어 국내최초 공개한다.

마침 비극의 주인공 고 장수옥 할머니(증언기록당시 78세.2005년 2월 21일.강원도 양구군 동면 후곡리.)의 자녀 한 분(장녀 김미경)이 우리 광진구로 이사를 와서 6년차 거주중인 바,

년초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어 본지의 설득으로 국권상실 ‘일제강점기 조선처녀들 국내 일본군수공장 강제공출상황 육필역사증언‘을 통해 그 어둠속에 묻혔던 진실이 본지를 통해 78년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첩첩산중 강원도 산골 오지마을까지 동네 구장을 앞세운 일제 순사들의 민족강탈,조선남자 강제징용(당시 마을어른들은 ‘조선사람 씨말리기‘로 표현),14세~20세 조선처녀들의 정신대공출사냥,국내외 일본군수공장노동자 강제동원 등 야만의 짐승같은 잔학상을 그대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해방후 인연이 되어 결혼한 남편도 일제강제징용자였다.

남편 고 김진직씨(2004년 작고)는 일제강제징용으로 일본대판의 제강공장에 끌려갔다.

그러나 해방후 고국 양구는 38선이북이라 북한점령지였다. 한국전쟁휴전무렵엔 북한 점령지역이던 양구군은 수복지구가 되어 춘천,원주 등 피란민수용소 청년대장,경비대장 등으로 활략하며 지역군단을 방문하여 양구군의 안정적인 수복정착계획수립을 촉구하고,

향후 양구군청과 주요 기관의 입지자리를 자문하는 등 양구군 수복창설의 애국적인 선구자였다.

이후 청년 김진직은 모 운수회사 양구군 소장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던 바 마침 박정희정부의 국가산림녹화시책에 적극호응하여 자비(일부는 국비보조)로 헐벗은 양구 고향 민둥산에 37만주 애림조림시업.(양구군청 조림대장 근거)

그러나 혁신계인 김철 통일사회당 가담으로 두 딸은 직장에서 추방되고,김대중 동교동집을 방문했다(CCTV자료)며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출소후 시름시름 앓다가 37만주 나무도 다 빼앗기고 나중엔 양구군청 앞에서 병든 몸을 추스르며 매일 출근하다시피하여 일인시위하며 “살기가 어려우니 나무값으로 1천만원만 달라“하자 군수가 “알았다“고 했으나 얼마안돼 김진직선생은 산중에서 아무도 몰래 저승사자에게 끌려감. 그리고 김진직선생이 사망하자마자 김씨가 일군 바로 그 울창한 숲을 이룬 후곡약수터자리에 양구군약수터관광지개발 본격착수. 유족들은 “나무값은 한 푼도 못받았다“고 주장하고, 한편 “산주는 산만 팔았지 나무는 안팔았다. 함부로 행동하지말고 조심하라“했다“며 유족들은 항변하는 상태.

한편 장남은 6.25때 엄청난 포탄터지는 소리와 진동의 후유증으로 귀의 고막이 터져 난청때문에 온갖 왕따를 당하다 결국 고등학교 2년 자퇴하고 마침 아버지가 일구는 후곡리약수터 움막에서 10년 가까히 무보수로 산지기 일을 했다.(아버지의 조림시업을 도움. 이때 외로움을 달라기위해 통기타를 배워 나중엔 양구읍내에 통기타학원도 운영.지금은 생계를 위해 밤무대 오르간연주 출연. 막내아들도 군제대후 5년간 무보수로 이곳에서 부친의 조림시업 도움)

국권상실 분단시대 나쁜정치 등 암울했던 시절 역사비극의 희생제물이다.

이번 공개원고는 고 장수옥 할머니의 78세때인 2005년 2월 21일자 육필원고다. 이후 2015년 하늘나라로 가심.향년 88세.

정부의 일제강제징용피해자보상관련 재조사시 작성한 원고다. 어머니가 고령인 관계(당시 78세)로 딸들이 역사의 증언확보를 위해 어머님에게 경험한 사실그대로 기록하도록 조언했다.

생각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기억은 또렷했고,필력 또한 독해가 충분할 정도로 잘 표현했다.

장수옥 할머니는 육필원고에서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증언했다. 강원도 오지 두메산골까지 일제마수의 강제징용과 정신대공출만행 현장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증언이 생생하여 사료가치가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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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수옥 할머니는 해방후 만난 남편도 일제강제징용자다. 부부가 국권상실의 슬픈 비극의 희생의 제물이다. 장수옥 할머니의 국내일본군수공장 강제노력동원현장의 생생한 탈출기 육필증언이 78년만에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햇빛을 보게 되었다/광진의소리


“...(전략)...

그러던 어느 날 日本순사가 동네 구장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면서 시집 안간 색시는 14살부터 20세 까지 어머니와 함께 공회당으로 모이라고 하더군요.

모두 모이자 책임자 하는 말이 너이들, 日本 에 충성할 기회가 왔다.

옷가지를 챙겨가지고 다시 모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들이 대성통곡을 하여 아들 다 잡아가고 딸마저 잡아가느냐, 딸은 못 보낸다(정신대)가면 日本병정 양말 빨고 계집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데 어린것들을 ...“하며 통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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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못 보낸다.

딸 죽이고 어미들도 다 죽겠이겠다며 아우성을 치자 양복신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大東亞전쟁은 朝鮮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요.

그만한 충성도 못하겠소.
지금 日本병정들이 전쟁터에서 입구 싸울 옷이 부족해요.

그래서 총알이 뚫치 못하는 옷을 만드는 공장이 생겼어요. 그리고 딸들을 보내겠소. 거기는 日本이 아니고 朝鮮이요.“라고 해서 장수옥 소녀는 다행히 일본정신대로 안끌려가고 춘천에 생겼다는 일본군수품생산공장으로 끌려갔다.

이하 소중한 역사의 증언으로서 그 기록보존을 위해 본지는 육필원고 사본과 함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순수한글판(원문그대표 옮김)을 공개게재한다.

10대소녀의 야밤공장탈출기가 전설의 고향같다.

어린 소녀들이 얼마나 공포속에 휩쌓여 있는 심리적불안상태였는지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본지는 육필원고진본은 유족들이 가족들과 협의해 일제강제징용희생자단체 또는 국립중앙도사관에 기증할 것을 권고했다.


- 이하 육필원고 사본 및 (원문그대로)현대글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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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부터 64年前 이야기

내 나이 15.16살적에는 대동아전쟁 막바지라 상당히 살기가 힘들었어요.

남자들은 보국대나 병정으로 다 잡혀가고 곡식은 모두 공출로 바치고 대신 콩깻묵 배급을 타먹었으니까요.

그것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고고꾸 신민노세이시((황국신민선사/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제국주의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제가 암송을 강요한 글임.편집자 주)를 배급(가가리)앞에서 줄줄 외우는 사람부터 줬으니까요.

못 외우는 사람은 외울 때까지 배급을 못 탔지요.
그리고 전쟁터에서 기름이 부족하다면서 관솔 기름을 내서 바치라고 했어요.

집집마다 몇 초롱씩 배당이 나왔어요.
늙은이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도끼 낫을 들고 산으로 관솔을 캐러 다녔지요.

관솔을 캘 때가 없자 복숭아 나무진까지 따다 바쳤지요.
日本순사들은 긴 쇠꼬챙이를 들고 집집마다 쑤시고 다니면서 곡식은 어대다 감췄어, 목화는 어대다 감췄어, 만약에 나한테 들키면 이 쇠꼬챙이로 너이들고 쑤실 줄 알아, 하면서 이 구석 저 구석 푹푹 쑤셔댔어요.

그리고 아들 다 내노라고 매일같이 와서 조사를 하고 또 했지요.
어른들은 日本순사만보면 벌벌 떨었지요. 日本놈들이 朝蘚사람 씨를 말리려고 저러는 게 아니야, 이대로 나가다간 朝鮮사람 씨마르겠네, 죽지도 못하고, 어찌 사느냐면서 수군댔지요.

그러던 어느 날 日本순사가 동네 구장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면서 시집 안간 색시는 14살부터 20세 까지 어머니와 함께 공회당으로 모이라고 하더군요.

모두 모이자 책임자 하는 말이 너이들, 日本 에 충성할 기회가 왔다. 옷가지를 챙겨가지고 다시 모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들이 대성통곡을 하여 아들 다 잡아가고 딸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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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가느냐, 딸은 못 보낸다,

(정신대)가면 日本병정 양말 빨고 계집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데 어린것들을 죽어도 못 보낸다.

딸 죽이고 어미들도 다 죽겠다며 아우성을 치자 양복신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大東亞전쟁은 朝鮮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요.

그만한 충성도 못하겠소. 지금 日本병정들이 전쟁터에서 입구 싸울 옷이 부족해요. 그래서 총알이 뚫치 못하는 옷을 만드는 공장이 생겼어요.

그리고 딸들을 보내겠소.
거기는 日本이 아니고 朝鮮이요.

일을 열심히 하면 父母도 만날 수 있고 집에도 올 수 있소 빨리 준비하시고 열심히 옷을 만들어 싸움터로 보낸다면 그보다 더 충성이 어데 있소, (정신대)만이 충성이 아니요.

그리하여 우리는 밤10시에 트럭에 탔다. 캄캄한 그믐 밤이라 서로에 얼굴도 볼 수없어죠. 얼마를 갔을 까, 내리라고 해서 정신을 차려 내려 보니 허허 벌판이고 긴 늘례집이 있었다.

버스도 못 타보고, 정기불도 처음본 애들이라 어리벙벙서 있는 데 신사 한사람이 나왔어요.

하는 말이 너희들 운이 좋았다. 정신대 가는 것을 내가 이리로 데려왔다. 사람이 부족해서 이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日本에 충성하는 거다.

여기는 春川 마와다 공장이다.

총알을 막는 옷을 만들어 전쟁터로 보내는 곳이니 열심히 하는 것만이 충성이다. 내일 부터 나는 너희들을 감독할 사람이다. 내말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는다.

내일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히노마루노하다(※히노마루노하다 = 일장기. 편집자 주)를 올리고 日本병정을 위해 묵염을 하고 아침체조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 6시에 일을 시작한다.

그러더니 식당으로 데리고 갔어요. 밥을 쭉 차려놨었어요. 감독 하는 말이 이 밥은 너희들을 위해 특별한 밥이다. 쌀을 섞은 밥이니 만큼 잘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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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부터 열심히 일하기 바란다고 했어요. 밥은 메수수에다가 쌀 약간 반찬은 늙은 가지 소금에 버무린 거였어요.

이튿날 종이 뗑뗑 울리자 잠을 깨니 4시었어요.

체조까지 다 마치고 식당에 들어오니 밥이 달라졌어요. 훅 부르면 나라갈 듯한 메수수 삶은 거에다 슬근 가지였어요.

아침에 찬 물에 손을 담그면 저녁에야 손을 빼서 너무나 힘이 들고 배두 고프고 공장 앞에 무 밭이 있었는데 여러 번 훔쳐 먹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英子가 도망을 가자고 해서 어머니가 보고 싶은 차에 무조건 도망을 쳤어요

길을 잘못 들어 산속을 헤매고 있었지요. 너무 캄캄해서 옆에 친구도 안보이고 누가 뺨을 쳐도 모를 정도 이었어요. 도망가자,

붙들리면 다리를 불겨 논다 하였는데 거기 있을걸.

오두가두 못하고 산속에서 죽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어요.

벼랑길 솔밭속이 환해져서 정신을 차려보니 하얀 꼬부랑 할머니가 똑똑 지팡이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어요. 할머니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쳤지요.

할머니, 우리 좀 살려 주세요 우리는 길을 잃었어요, 할머니네 집에서 자고가게 해 주세요,

소리소리, 질렀지만 할머니는 오메타 앞에 와서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어요.

우리는 다시 소리쳤지요. ‘할머니 거기 서 계세요’ 저이가 갈게요.

우리는 뛰었어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저만큼 가서 우리를 보고 서있었어요.‘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하고 같이 가요’ 해도 대답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어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저 할머니는 사람이 아니다. 밤중에 솔밭에서 꼬부라진 할머니가 휙휙 날다시피 걷다니 생각은 했지만, 의지할 것은 할머니밖엔 없었어요. 할 수없이 ‘할머니 제발 우리 좀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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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뛰어갔더니 할머니는 우리들과 똑 같이 행동을 했어요.

우리가 뛰면 뛰고 걸으면 걷고 앉으면 앉고 서면 같이 서는 거였어요.

우리는 말했어요. 죽어도 손을 놓지 말자 가시가 찔려도 짐승이 와서 물어도 물에 빠져도 불이 붙어도 절대 손을 노면 안 돼 손을 노면 우리는 죽는 거야 죽으나 사나 저 할머니만 날이 밝도록 따라가자. 약속을 하고 할머니만 따라가는 데 졸음이 오더라고요.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 데 정신을 차리려 해도 정신이 들지 않았어요. 앞을 보니 앞이 안 보이는 넓은 바다였어요. 할머니가 생각나서 여기 저기 살펴보니 할머니는 강 건너에 서서 우리만 바라보고 서 있더군요. 할머니 어떻게 건너갔어요. 어디가 제일 얕은지 알려주세요. 우리 하구 같이 가세요. 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는 다리를 동동 구르면서 , 막 울었지요.

그런데 울다보니 물이 어데 론가 사라졌더군요. 물이 없다 할머니 우리랑 같이 가요 뛰기 시작하자 할머니도 뛰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너무 지처 걸어갔어요. 할머니도 걷더군요. 그런데 어데 선가 목탁소리가 들려왔어요. 똑딱 똑딱 ‘야’ 어디에 절이 있나보다. 절에 들어가 쉬어갈까

그러자 英子가 소리쳤다. ‘이년아 정신 차려 어딜 들어가자는 거야, 너나 들어가’ 나는 목탁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 밑에서 중(스님)이 장삼을 입고 목에 염주를 걸고 똑딱 똑딱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우리는 중(스님)의 염불 소리를 들으면서 한없이 할머니를 따라 갔지요. 그런데 별안간 맛있는 음식냄새가 코를 찔렀어요. 옆을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 속에서 남자들은 왔다 갔다 하고 여자들은 예쁜 옷들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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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게도하고 음식을 나르고 있더군요. 나는 들어가고 싶었어요. 英子야 우리 저 집에 들어가 볼까, 제산가 봐, 그러자 英子는 화를 벌컥 내면서 너 혼자 들어가 너 정신 나갔어, 어딜 들어가자구 정신 차려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昌歌를 해야겠다. 잠이 안 오게 그리고 산이 쩡쩡 울리게 씩씩한 昌歌가 뭐가 있니,

그리하여 우리는 (갓데구루 소또이 사마시꾸)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계속 노래를 부르며 발로 땅을 탕탕, 구르며 손발을 있는 데로 움직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힐끗 힐끗 뒤를 돌아보며 걸어가고 있었어요.

우리는 너무 소리를 지르다보니 피곤해서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데 무엇이 내 얼굴을 툭툭치는 거였어요. 손으로 치웠지만 또다시 북슬북슬한 털 같은 것이 얼굴을 툭툭 치는 거였어요.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히얀한 짐승들이 줄을 서서 우리와 함께 걷고 있었어요.

이때다 싶어 큰소리로 악을 박박 쓰면서 英子와 같이(미여도까이노 소라아께데) 악을 박박 쓰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지요. 그랬더니 얼굴은 치지 않고 따라 오기만 했어요. 더 힘을 내서 발로 탕탕 구르며 손을 있는 대로 휘둘렀지요.

그랬더니 짐승들이 하나 둘 사라졌어요. 우리는 그 고생을 하면서 할머니를 놓칠 새라 악착같이 따라가다 보니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벼랑간 물이 먹고 싶어 사방을 둘러보니 길옆에 조그만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어요.

문 앞에 가서 ‘주인 계세요’했더니 주인 하는 말이 짐승이면 빨리 돌아 가구 사람이면 물마시고 돌아 가시요. 동이에 물 한 동이 길어다 놓고 바가지 띄워 놓았으니 실컷 마시고 돌아 가시요. 하면서 문도 열지 않았어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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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실컷 마시고 보니 할머니는 여전히 저만치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지옥같이 어둡던 밤이 점점 환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별안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는 할머니, 할머니 불렀지만 보이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서 있던 자리에 가서 사방을 둘러 봤더니 언덕 위에 조그만 오막살이가 있었어요. 저 집 할머닌가 봐 들어 가보자. 우리는 집문 앞까지 가니 60쯤 되는 아저씨가 싸리문을 열면서 하품을 하고 나오셨어요. 우리는 다가가서 아저씨 할머니 어디계세요 고맙다는 인사하고 집에 갈려고 그래요. 방에 계시나요.

그러자 아저씨는 할머니, 무슨 할머니 이집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데 너희들 어떤 할머니를 찾는 데, 그러더군요. 우리는 사실을 말했더니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를 한없이 바라보더니 그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야, 너희들이 불쌍해서 산신령님이 너희들을 여기까지 데려다 놓고 가신거야 하셨어요.

우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발을 보니 발가락마다 부루 터서 피가 줄줄 나오고 있었어요. 그걸 보니 꼼짝도 못하겠고 일어설수가 없었어요. 신작로에 털썩 주저앉자 발만 드려다 보고 있는 데 1日 1회식 楊口 春川간을 운행하는 東春여객이 楊口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6人승인데 우리 앞에 오자서더군요.

돈이 없어 망설이는데 조수가 문을 열더니 아니 너희들이 웬 일이냐 소문에 (정신대) 잡혀갔다 들었는데 너희들 도망오는거냐. 잡히면 가만 안둘 텐데 도망은 왜와 안됐다. 타라 데려다 줄께 그래서 우리는 종점까지

무사히 와서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나는 발 아픈 것도 잊은체 뛰어가서 집 앞을 가니 못 보던 차 한대가 와 있었어요.

나는 기웃기웃 마당을 들어서자 두 남자가 나를 잡아끌어 차에 태웠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 오셨어요. 나를 태운 차는 쏜살같이 떠나 버리자 어머니는 땅에 주저앉아 우시는 모습을 나는 차 안에서 내다보면서 공장으로 끌려왔지요.

그런데 하루 사이에 많은 아이들이 붙들려와 있었어요. 나는 감독한테 넘겨져 7名이 자는 방으로 들어가게 됐지요. 나는 그날부터 7名 세숫물을 매일같이 떠다 바치고 청소, 빨래 등을 시키더군요.

내가 잘 자리가 없어 앉아서 자다시피 지내면서 일을 했어요.

이제는 죽으나 사나 여기서 사는 거다, 마음을 비우고 살다보니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고 8月15日 해방이 되자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지요.

나는 지금도 그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답니다.
노인 회관에 가면 나는 그 이야기를 많은 노인들한테 들려 드리곤 합니다.
나는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10日에 한 번씩은 한 것 같아요.

진술자: 나이 78세 장 수옥
그 때가 眧和 18,19년(1943년,1944년-편집자 주)으로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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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호>는 위 고 장수옥님 남편의 억울한 삶 이야기

<<일제강제징용자 고 김진직선생의 국란4란 비극수난의 진실>>

-일제강제징용일본대판으로 끌려감,해방후 귀향해서 결혼한 부인(위 장수옥 할머니)도 알고보니 일제강제징용 국내공장공출자, 한국전쟁휴전무렵 양구수복지구 경비대장 춘천피란민수용소 청년대장 군부대방문 양구군수복정착계획촉구 등 양구군 조기안정화 일등공로자,

1967년부터 박정희 국토산림녹화10개년계획 적극동참 헐벗은 고향민둥산에 자비로 37만주 조림시업(양구군청 조림대장 근거), 이후 김철 통사당 혁신계가담으로 자녀직장추방,37만주 조림근거 무력화대응 온갖 수모,김대중집방문했다고 삼청교육대로 강제수용,퇴소후 병원생활하다 시름시름 앓다가 37만주 나무도 다 빼앗기고 산중에서 아무도 몰래 저승사자가 데려간 참담한 삶 등 우리 한국 근*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한 가정의 참담한 역사의 수난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현재 자녀들은 아버지의 억울한 삶의 진실규명을 위해 ‘37만주 양구나무찾기 추모음악회‘ 등 국민과 양구 군민의 양심에 호소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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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만주 양구나무진짜아빠찾기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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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문장력이 빼어나십니다 (보통시민)
78세고령에 64년전 일을 기억해내서 쓰신건데 모든 어투나 용어 모두 직접경험한 글이 역력합니다. 아들 다 잡아가고 딸마져 잡아간다며 통곡하며 죽어도 딸들은 안돼하며 통곡한 당시 이 땅의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이 글에서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일제만행 국내공장징용 두 소녀의 용감한 목숨을 건 탈출기도 처음봅니다. 집에 와보니 대문앞에 벌써 대기하고 있는 ... 무사히 와서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나는 발 아픈 것도 잊은체 뛰어가서 집 앞을 가니 못 보던 차 한대가 와 있었어요. 나는 기웃기웃 마당을 들어서자 두 남자가 나를 잡아끌어 차에 태웠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 오셨어요. 나를 태운 차는 쏜살같이 떠나 버리자 어머니는 땅에 주저앉아 우시는 모습을 나는 차 안에서 내다보면서 공장으로 끌려왔지요. ... 아직 10대 소녀들이라 그 생각까지는 못한것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고 장수옥 할머니 삼가 명목을 빕니다. 자식들의 추모음악회의 성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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